• 최종편집 2024-12-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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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거사 사죄 운동에 앞장서 온 오야마 레이지 목사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나이 96세. 그의 삶은 한·일 간의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한 한 알의 밀알과 같았다. 새에덴교회는 3·1절이나 8·15광복절이 되면 일본의 양심적인 인사들을 초청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오야마 목사님은 두 번이나 우리 교회를 방문해 사죄의 절을 했다. 뿐만 아니라 2015년, 30만명 넘게 모인 광복절 집회에도 참석해 엎드려 사죄의 절을 했다.

 

필자가 초청할 때마다 기꺼이 한국을 찾아준 그에게 빚진 마음이 가득하다. 이런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분이라고 왜 민족애와 조국애가 없겠는가. 그러나 그는 일본 기독교의 양심이고 최후의 보루였다. 그렇기에 수많은 오해와 수모, 박해를 감내하면서도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위해 노력해 온 것이다. 별세 소식을 듣고 조전이나 조화로 대체할 수 있지만 직접 찾아뵙는 것이 그분에 대한 예의이고 보답이며 한·일 간 화해의 징검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일찍이 김영진 전 국회의원과 함께 한·일 간 화해와 평화를 위해 한일기독의원연맹 지도목사로 섬겨왔다. 당시 만난 분이 도이 류이치 의원이었다. 그는 일본 민주당 원내대표이자 7선 국회의원을 지낸 유력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2011년 3·1절에 우리 교회를 방문해 독도의 한국 영유권 주장을 담은 한·일 공동선언문을 낭독하고 서명한 사건 때문에 큰 고초를 겪고 정치생명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받은 충격과 극심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힘든 나날을 보내다 결국 고인이 되셨다. 그러나 그분은 마지막까지 조금도 원망하는 마음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작게나마 실천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오야마 목사 역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 일생을 바치신 분이다. 그는 목회자가 된 후 일본인 최초로 아시아 각국에 사죄운동을 전개했다. 제암리학살사죄위원회를 발족해 1000만엔을 모아 제암리교회 재건과 순교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면서 사죄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우리 교회를 방문했을 때도 사죄의 절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여러분의 조상을 고통에 빠뜨린 데 대해 아무리 사죄의 말씀을 드려도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사죄하겠습니다.” 그분의 생애를 생각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숙연해진다. 그래서 월요일 첫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친구인 하요한 선교사의 안내로 상주인 오야마 세이지 목사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 그리고 귀빈에게만 공개하는, 특별안치실에 가 고인의 잠든 얼굴을 뵈었다. 가슴이 울컥했다.

 

고인의 환한 안빛과 웃는 모습이 참으로 평안하게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먼저 기도를 하고 상주인 세이지 목사님이 기도를 했다. 우리는 포옹하며 약속했다. 그는 끝까지 아버지의 유훈을 이어받아 일본 안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이 세워지도록 노력하고 한국을 향해서는 끊임없이 사죄하는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사과와 사죄를 받아들이며 한·일 간 화해와 평화의 다리를 놓는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 둘 다 눈물을 훔쳤다. 살아 있는 자는 서로 울컥했지만 정작 잠든 분의 얼굴은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주일예배를 다섯 번 인도하고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 일본에 간 나의 결단도 컸지만, 그냥 조문만 받지 않고 부친이 잠들어 있는 특별안치실로 인도해 주신 상주 세이지 목사님의 특별한 배려도 고맙게 느껴졌다.

 

일본은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한국을 향해 사과하고 사죄하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한국은 과거에만 매여 있지 말고 미래로 나가야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오야마 목사님의 정신과 가치를 존중히 여기면서 양국에 화해의 징검다리를 놓고 대한해협에 ‘피스 브리지’(peace bridge)를 놓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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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오야마 레이지를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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