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서서히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면서 어느 날에 바람이 불면 사과가 땅에 떨어지듯 땅 위에 소리 없이 떨어지고 만다.
지난 4월 9일 내 가까운 친구 고 김응천 장로(모리아성결교회 원로)가 소식도 없이 하늘나라에 가버렸다. 그것도 아무에게도, 친지, 교회도, 알리지 말고 가족장으로 해 달라는 평소 유언을 따라 4월 10일 입관을 거쳐 11일 장례식장에서 작은 아들이 섬기는 해운데 모 교회 박모 목사를 모시고 발인예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밀양 가까운 수목장에 묻혔다는 소식을 몇 달이 지나서야 지인으로 부터 듣게 되었다.
이 친구가 평소 이루어 놓았던 업적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섬기던 교회에 수백평의 땅을 기증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수십여명의 해외 선교사들에게 교회개척이며 선교후원비를 하늘나라 가는 날까지 지원하는 등 선교 지원에 미쳐 있는 분이다.
평소 자기 부인에게 “내가 떠나게 되면 가족장으로 조용히 떠나게 해 줘”라고 말했을까? 아마 알리게 되었으면 발인 잔치로 교회가 떠들썩 했을 것이다.
일찍이 중부산기독실업인회와 서부산기독실업인회, 국제와이즈멘 시온클럽이며 대내외적으로 믿음가는 대로 적을 두고 봉사하며 헌신해 왔다. 이름 글자대로 ‘하늘에서 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이룩해 놓은 부지이며 유산은 거의 교회와 선교사업에 기부하였으며 자기는 바다에 빠져있는 배를 건지는 도선사업을 하다가 중도에 하차하고 말년에 암이란 진단을 받고 항암하며 조용히 지내왔는데 어느 날 기도가 막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아들이 나가는 해운대 개척교회에 선교헌금 5천만원을 목적헌금하며 마무리 짓고 아프지 않는 하나님 보좌 곁으로 가고 말았다. 이 친구와 김상권 장로, 필자, 김종수 장로(선교사)는 한 달포에 한 번씩 송도공원 음식집에서 모여 회포를 풀며 정답게 이야기 꽃을 피워왔다.
요 근간에는 지팡이를 집고 와서는 미리 예견하듯이 “모두들 잘 살아왔으며 고마웠다”고 고별 같은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모리아교회 옆 신익아파트에 필자가 차로 모셔다 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친구는 이렇게 말없이 떠나고 말았다. 필자와는 동갑내기로 선교사업에 누구보다 열정적인 사나이였다. 김응천 장로는 평소 각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의 신앙 간증을 수없이 해 왔다. 최근에는 섬기던 모리아교회를 떠나 아들이 출석하는 해운대 개척교회에 따라 다닌 것으로 안다.
일찍이 북한 평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서 월남한 월남 가족이라 일가 친지도 없이 외로이 살아 왔다. 부산 중구 보수동 보수성결교회(고 조두영 목사 시무시절)부터 출석하다가 괴정으로 교회를 이전하면서 모리아성결교회로 개칭하여 수백평 대지를 교회에 헌납함으로써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김응천 장로가 건축위원장으로 섬기며 교회 건축비도 거의 김 장로가 헌금하여 완공하게 되었다.
이번에 알게 되었지만 세상에 살면서 하늘나라에 갈 때는 이렇게 조용히 떠나는 것이 매우 신앙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온통 떠들썩하게 알려 떠나가는 것보다 훨씬 하나님께 조용히 하고 가는 것이 더 신앙적일 것 같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름 나 있으면 온통 신문과 부고를 보내 알리고 만다. 자기가 섬기던 교회야 어쩔 수가 없지만 김응천 장로는 그야말로 자신이 개척한 곳이나 친지 등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어느 쪽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것도 자신의 농장에도 아니고 가까운 근교 수목장에 한 그릇 나무를 매입하여 땅으로 돌아갔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가? 언제까지나 젊음이 지속될 줄 알았건만 세월은 역시 누구도 피해가는 법이 없다. 마지막 가는 날에 어떻게 마무리하고 죽느냐가 우리에게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 청산일 것이다. 이제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가 됐을 때, 가장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다윗의 마지막 말이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리라 하시도다(사무엘 상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