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꼭 이런 친구가 있었다.
“나, 이번 기말고사, 공부할 시간이 너무 없어서 외우지도 못하고 한 번 읽기만 했어”
그런데, 막상 시험을 치면 90점 혹은 100점. 나는 시험 범위를 몇 번이고 읽고 외워도 80점이고, 영어 단어는 외운 후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했는데 한 번 스윽 훑고 시험을 쳤는데도 90점 이상이 나오는 친구가 있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정말 부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기억력’ 좋은 것은 곧 좋은 성적과 성공의 보장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천재들의 소유물인 기억력을 갖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보니, 나에게는 기억력과는 정반대의 은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잊어버림의 은혜’ ‘망각의 은혜’이다. 인간에게는 기억하는 능력의 축복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잊어버리는 은혜의 축복도 있다. 망각이라는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수많은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이상행동과 정신질환으로 어지럽고 혼란스런 세상 속에 놓여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색다른 은혜는 바로 ‘망각’이라는 선물이다. [망각의 즐거움]이란 책을 쓴 임희택은 대한스트레스학회 정회원으로 스트레스 전문센터를 운영 중이다. 스트레스와 관련된 칼럼을 쓰고, 철학 심리학 인지 과학 등으로 밝혀낸 망각과 몰입의 기술을 소개한다. 그는 망각은 필요 없는 스트레스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에너지를 현재에 집중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 책은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마음 비우기, 명상 용법 등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망각의 필요성을 인문학으로 접근해 독자들을 설득시키고 동시에 몰입하는 기술을 알려준다.
“기억을 다스리는 자가 행복해진다”
“현대 사회의 모든 심리적 고통은 기억에서 온다”
물질의 음과 양이 있듯, 인간도 기억과 망각 모두 필요하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으며, 달릴 때가 있고 멈출 때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기억하는 힘보다 망각하는 힘이 더욱 중요하다. 행복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망각 없이는 결단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기억이 축복과 진리라면 망각도 축복과 진리이다.
그러나, 인간의 상처는 이런 원리들을 거슬러 반대로 한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꼭 잊어야 할 것들을 기억한다. 신앙인으로 내가 죄인인 것, 구원받은 은혜는 꼭 기억해야 하는데, 이런 사실들을 때때로 잊으면서 기도 응답 받지 못한 것, 공동체로부터 받은 상처는 아주 작은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인간은 하루도 수 천 가지, 수 만 가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90% 이상이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망상 같은 생각이라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멈추거나 잊고, 은혜의 기억들을 간직하며 사명자로 살아야하지 않을까?
성경은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기억과 망각에 대한 교훈을 제시한다.
모세는 과거의 영광도 많았지만, 영광만큼 아픔 또한 많았던 인물이다. 왕궁에서 왕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 영광을 잊고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 부름 받은 후, 광야에서의 40년을 보내며 자신의 상처는 잊고,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은 기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다.
모세는 사명의 사람이었고, 사명을 통해 ‘기억의 은혜’와 ‘망각의 은혜’를 잘 사용해 위대한 지도가가 되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한번 돌아보자. 잊어야 할 상처와 아픔에 묶여 여전히 한걸음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 지체가 있지는 않은가? 혹은 수많은 상처와 고난을 겪었지만 그 경험을 자신의 자양분 삼아 은혜의 기억으로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는 지체가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망각을 넘어 새로운 미래의 소망, 날 부르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속에서 샘솟듯 흘러나게 될 것이다.
과거 상처와 아픔에 대한 망각의 은혜가 다시 미래를 향한 사랑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할 것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