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198명의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고, 5월 31일 오전 10시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대한민국 국회를 개원했을 때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은 서울 종로 갑구에서 당선된 이윤명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이 기도문은 대한민국 공문서 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속기록 제일 앞 부부분에 기제 되어 있다.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한 것은 “종교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승만의 신앙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정사(政事)에 앞선 이승만의 기도요청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최근 김정민 박사에 의해 공개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이승만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한 김정민 박사는 「월드뷰」 2023년 4월호에 기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외교의 시작은 기도였다”라는 글에서 1919년 8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를 전담했던 구미위원부 출범식에서도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기도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대위 박사께서 목사로서 기도로 구미위원부 창립식을 열어주시겠습니다.” 이 요청에 따라 이대위 목사는 회의에 앞서 1,854자에 이르는 긴 기도로 회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영문으로 기록된 이 기도문 전문이 김정민 박사에 의해 번역되어 위의 잡지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국내외에서 명칭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는데, 1919년 9월 11일에는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들이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이후 김구, 이승만, 박은식 등이 임정의 수반을 거쳤다. 그런데 통합된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약 2주일 전인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한성정부(漢城政府)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를 설치했다. 민족의 대표성을 지닌 외교기관의 출범이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위원장은 김규식이었고 위원은 송헌주와 이대위였다. 그런데 이 구미위원부가 공식 출범하게 된 8월 27일 공식적인 회의에 앞서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시작하는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이승만에게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건국 이상을 지닌 분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기도했던 이대위(李大爲, David Lee, 1878-1928) 목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정민 박사에 의하면 이대위는 1878년 평안북도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니 이승만 보다 3살 아래였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유학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때는 1903년이었다. 이때부터 동포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단합을 모색했고, 1905년 4월에는 민족운동 기관인 공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1908년 포틀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고, 그해 가을 UC 버클리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이대위는 <공립신보>, <대도>, <신한민보> 등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에는 국민회의 설립에 관여하였고, 1910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부회장으로 국민회의의 기초를 닦았다. 그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애국동맹단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그런데 그가 신학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인 1911년 2월 32살의 나이로 상황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윤병구 전도사의 후임이었다. 이때부터 50세가 되는 1928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 간 이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런데 1912년에는 집사목사(deacon) 안수를 받았고, 1913년 5월 14일에는 버클리대학교를 졸업했다. 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학사학위(Social Science)를 받았다고 한다. 1918년 4월 25일에는 산 안셀모에 있는 센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의 일이었다. 그해 10월 10일에는 미국남감리교 태평양 연회에서 드 보세(Du Bose) 감독에게 '장로목사'(elder) 안수를 받았다. 이처럼 면학과 목회활동과 함께, <대도>와 <신한민보>의 주필로서의 문필활동, 그리고 민족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래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19년 3월 미국에서 독립선언서에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같이 서명하였고, 1919년 8월에는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래서 그 출법식에 대표기도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시절에도 기도로 회무를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 이대위라는 한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기에 역사연구란 사건과 인물과의 만남(encounter)이라 하지 않았던가! (202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