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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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쳐낼 수 없다. 연합이라는 미명으로, 이단마저 수용하려는 연합기관의 통합 시도를 수긍하기 어렵고, 또한 연합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뒤로는 명분과 존중은 상실한 채, 독단과 독선으로 공익을 위한 연합사업을 주무르며 그르치는 행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그런데 만약 연합이라는 미명으로 신앙고백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교계의 분열을 조장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다.

 

부산, 광주, 제주는 역사적으로 국내에서 교회연합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곳들이다. 서울처럼 기독교 교세와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교파 및 교단 간 연합과 협력의 필요성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차별화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광주와 제주, 그리고 복음화율이 저조한 불교의 땅에서 고군분투하는 부산지역에서의 연대와 연합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연합을 통해서만이 기독교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고, 사회적 순기능과 선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지역의 경우, WCC 문제로 지역 교계가 이견을 노출하고 갈등했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또한, 교계가 연합으로 주관하는 대표적인 사업이었던 광복동 트리 축제의 의미도 상처받고 퇴색되어, 이제는 이전의 위상을 유지하고 역할을 회복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게다가 부산지역 교계의 숙원사업이었던 기독교 역사박물관 건립 추진도 난항을 거듭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부산지역 기독교 연합운동에 대한 실망과 허탈함이 자꾸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다행히 지역교회 후원과 기도로 운영되는 부산성시화 이단상담소의 초교파 이단 대처 활동에 참여하는 일은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느낌이다. 퇴색되어 가는 연합정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는 마치 선물과 같은 사역이다. 날로 심각해져 가는 이단사이비 문제를 생각하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부산지역의 초교파적인 이단 대처 노력이 고마울 뿐이다.

연합과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상호존중과 배려이다. 배려는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세밀하게 살펴 베푸는 행위이다. 존중과 배려의 마음은, 다가오는 추석 명절에 가족들과 한 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는 곳도 다르고, 형편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지만,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살아온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랑하는 가족들을 추모하며,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을 용납하고 받아드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의견 충돌이나 다툼이 있어도, 매년 다시 고향을 찾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합기관들의 명분 없는 경쟁과 다툼은 주변 사회의 냉소적인 비판을 초래하고, 반대로 선한 연대와 연합은 교회의 순기능적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동시에, 복음의 본질 가운데 계속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을 위한 교계의 상호존중과 배려가 절실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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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연합인가, 야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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