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시에 있는 한산도 하면 이순신 장군이 일본 왜적을 물리친 한산대첩이 유명한 곳이기도 한 섬이다. 한산도는 한려수도의 시발지로서 우리나라 팔도의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청정 해역이기도 하다. 한산면은 면적 29.2km로 약9700여명 8개리로 구성되어 유인도 17개와 무인도 10여개 섬으로 이루어진 남단 섬마을이다.
한산면 두억리는 이 충무공 사적 제113제승당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본영을 설치하여 삼도수군 통제사 직무를 수행하시면서 1592년 7월 7일 왜적함 70여척을 한산면으로 유인하여 적을 대파한 이순신의 3대 대첩인 한산대첩, 지주대첩, 행주대첩 중 가장 큰 대첩인 한산대첩의 격전지로 유명하며 두억리라는 동명은 대첩시 적병의 머리를 억개나 잘랐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었다.
김재형(본명은 김오석) 장로의 출생은 1900년 10월 3일 이 시기는 그야말로 국운이 기울어지고 일본이 무력 강점하려는 그 당시 두억리 488번지에 부친 김성화 씨의 칠남매 중 사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러나 어린 3살 이유기에 타개하고 계모 슬하에서 형수의 돌보심 속에 자랐으니 유아기, 소년기는 가난과 학대 구박 속에서 암울한 세월을 보내었다.
아버지와 가족의 주선으로 어린시절부터 학당에서 한문을 배우게 되었고 그의 총명은 한학의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유교의 교육과 사상에 어린 꿈을 키웠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 간 연고로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고 고뇌하던 차에 김재형 소년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은 배우고 주경야독 각고의 수학에 전념하여 일찍이 독학으로 천자문, 명심보감, 논어 등을 탐독하고 일본을 대적하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적과 싸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15세 약간으로 일어 통역사가 되어 활약하였다. 17세에 행정사 자격을 취득하여 통영읍에 행정 대서소를 차려 가난과 억압 당하고 수탈당하는 억울한 동포들의 민원을 대행 봉사하게 되었다. 그는 일어 통역관으로, 행정사로 활약하는 한편 항일 독립투사들과 연결이 되어 그들과 비밀회합과 암암리에 그들을 지원하였다. 고성 출신 배만두와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1919년 3월 17일 독립만세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기관에 구금되었으나 문초를 받던 중 증거 불명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그 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의 길이 무엇인가 고뇌하다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위해 전력하기로 하고 1920년 삼일 운동이 일어난 다음해 교사 채용시험에 응시하여 20세에 보통학교 교사 자격을 얻어 한산공립보통학교 교사로 후진 양성에 정열을 불태웠다. 잠자는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죽도, 용초, 동학리, 한문반 등을 편성하여 거제 둔덕면 지역의 많은 청소년들을 가르쳤고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의 제자들 중에 김석산 씨는 현 서울대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김석계, 정상준 제씨들은 해방이후 한산 면장을 역임했다. 드디어 1905년부터 고성, 통영, 마산 등지로부터 호주 선교사 손안로(1889~1914)가 기독교를 전파하여 처음으로 통영읍에 문화동교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고성 성내동에도 고성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이들의 선교를 통해 처음으로 한산도에 복음의 빛이 비치게 되었다. 호주 선교사 추마전(1883~1955)과 권영수 전도사에 의하여 신거 부락 건너편에 대촌 마을의 작은 문간방에 머물게 되자 동민들이 서양 귀신이 왔다면서 추방한다는 소문이 돌자 김재형 청년이 대촌 마을에 가서 추마전 선교사를 자신의 마을 신거리에 부락으로 한 주택에 모시는 사랑의 배려가 그가 주님을 영접하는 계기가 되어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드디어 김 장로와 장재순 권사와 당질 김진권 등과 함께 1926년 5월 20일 현 두억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 교회가 한산도의 어머니 교회 모태가 되었다. 지금까지 1961년 61세에 두억교회 장로로 장립되어 시무하였고 부인 장재순 집사도 권사로 교회를 섬기며 믿음과 덕으로 교회를 봉사하였다. 김 장로는 어느날 뜨겁게 기도하던 중 “12개의 황금등대에 찬란한 빛을 환상”으로 보고 생전에 한산면에 12개처 교회를 설립하라는 하나님의 영감임을 확신하여 이 마을 저 마을 복음을 전하여 12개 등대의 꿈이 실현되어 무려 16개처 교회와 기도처가 세워졌다. 그의 부인 장재순 권사 사이에 3남 3녀 자녀를 두었고 장남 김기정 장로는 두억교회 장로로서 고향교회를 봉직하였고 고(故) 차남 김태진 장로는 부산대 법대를 나와 소정교회 장로로 국가 공직에 봉사하고 동아모빌 대표와 원양수산㈜ 대표이사로 섬겼다. 그리고 3남은 김형대 목사로 “두억교회 새벽종 소년”이란 별명으로 장성하여 서울 총회신학교 재학 중 육군에 입대하여 미8군 44병원 통역병 만기 제대 후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총신대와 장신대학원을 졸업, 미국 맥코믹 신학교 박사원을 졸업, 새중앙교회 담임과 그의 후신인 호산나교회 초대 담임목사(10년)를 거쳐 산성교회 담임목사로 유엔로교회를 개척하고 지금은 사단법인 제이알문화재단(기획재정부 장관 공익법인 지정 단체)로 한반도 세계 평화 비전을 품고 “한국교회 승천절 주일 제정 및 기념문화대회 실천제안”을 하여 은퇴 후 제2의 영적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3대가 김상문 장로(송도영광교회 시무장로)로 부산노회 장로부노회장과 부산노회장로회 회장을 역임한 가운데 이 가문에 태의 자식 업과 상급이 풍성하여 (목사 8명, 장로 5명, 박사 4명, 의사 5명, 약사 1명, 회계사 1명, 검사 1명, 교수 4명 총 29명) 종교계, 교육계, 법류계, 의학계 등의 지도자가 배출된 자랑스런 기독교 가문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