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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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지도자는 많은데 지도력 부재의 시대라고 아파한다.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다는 말이다. 국가 지도자든 사회지도자든 종교 지도자이든지를 무론하고 우리는 참 ‘지도자’가 그립다.

 

요즈음 듣는 여의도 1번지 이야기는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정말 해도 너무 한다.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나 언행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라면 정치인들에게서 어떻게 국태민안을 기대하겠는가.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모두가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 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를 생각하며 그들을 선택한 국민으로서 자괴지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오죽하면 ‘내로남불’의 발상지가 여의도 1번지라는 말이 회자(膾炙) 될까.

 

야당대표가 생사를 건 단식투쟁을 한다. 그를 두고 개인비리를 덮으려고 국정을 마비시키는 꼼수라며 매정하게 논평하는 여당 지도자들, 그것이 국정쇄신을 위한 애국충정이라고 옹호하는 야당 지도자들, 이들의 언행을 보면 어린아이도 돌아서서 코웃음을 칠 상황이 아닌가. 그들의 행태를 보면 문제를 풀어내고 화해와 상생의 멋을 이끌어내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너 죽고 나 죽자는 희한한 판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후벼 판다.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었으며, 사회가 시궁창 냄새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내 탓이오’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모두가 ‘네 탓’이다.

 

카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하게 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래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전 카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을 해왔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이와 같은 리더십에 우리는 박수를 보냈고 동참했다. 이 아름다운 운동이 확산되어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ς)’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귀감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를 위반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하고 운전을 하는 것을 심심찮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양심의 소리에 그나마 부끄러워져서일까? 이제는 ‘내 탓이오’도 ‘익수스’도 일상에서 볼 수가 없다.

 

요즈음 시대를 유튜브 범람 시대라 한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유튜브 방송이 미디어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그런데 이 유튜브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고 삶의 질을 다듬어주기보다는 정사(正邪)가 분별되지 않는 자극적이고 무분별한 내용으로 여과없이 쏟아지고 있다. 사리판단은 뒷전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선호하고 믿고 싶은 대로 생각이 기울어져 흑을 백이라 해도 박수를 보내고, 백을 흑이라 해도 박수를 보내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흑백으로 나뉘어져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공멸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간디는 일찍 우리를 파멸하게 하는 일곱 가지를 갈파했다. 원칙 없는 정치, 근로 없는 축재, 도의 없는 기업, 인격 없는 지식,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신앙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이 일곱 가지가 현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천천히 천천히 공멸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지고한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 이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지도력이 나왔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이 있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하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는 ‘내 탓이오’가 없다. 모두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를 펼친다.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이 세태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일지라도 그리스도인만큼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古稀의 중반을 넘기면서도 나는 1년에 70여 교회의 초청을 받으며 말씀사역을 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끄럽고 벌판이 되어가는 교회의 중심에는 항상 목사와 장로라는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갖는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leader는 있는데 leadership이 없다면 결과는 언제나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의 내용은 긍휼과 겸손과 섬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의 방법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었다. 진정한 leadership을 가진 leader가 있을 때 그 조직과 공동체는 평행감축(平幸感祝)의 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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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leader는 있고 leadership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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