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우리나라 ‘대한여자절제회’가 발족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절제(節制)라는 말이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함’이라는 의미이므로 절제운동이란 우리의 일상에서 근검절약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고 자족하는 안분(安分)한 생활을 생각하겠지만, 물론 이런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술과 담배를 금하는 절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WCTU: World 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는 1883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는데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프란시스 윌라드(Frances Willard) 여사에 의해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과 가정과 나라를 위하여’라는 목표로. 특히 술과 담배, 마약의 해독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으로 출발했지만 그 정신은 성령의 열매인 절제생활을 권장하고 보다 성결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시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미국사회에 큰 호응을 받았고, 곧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권과 스웨덴, 일본 등지로 확산되었다. 이 절제운동은 따지고 보면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각성운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음주와 이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각성운동의 지도자였던 리만 비치(Lyman Beecher)는 미국절제협회(Americal Temperance Movement)를 조직하고 금주단연운동을 전개하였다. 1820년대 술(위스키) 가격은 차나 커피, 맥주, 그리고 우유보다 싸게 판매되는 품목이었다. 그러다보니 과도한 음주가 사회 문제가 되었다. 1830년 당시 1인당 80프루프짜리 술을 1주마다 1.7병씩 마심으로써 연간 순수 에탄올 섭취량이 7갤런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과도한 음주는 미국 사회의 가장 위험한 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식 있는 여성들도 절제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의 창립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흡연, 마약, 기아, 매춘, 폭력 등 사회적인 문제의 근원은 음주라고 보아 음주와 흡연을 반대하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생활 개선을 고취하고 가난과 질병, 무지를 해결하고 순결과 평화를 이루며 국제간의 상호 이해와 평화를 증진시키려는 고상한 이상을 가지고 조직된 것이다.
이 여자절제운동이 1923년 9월 우리나라에서도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대한여자절제회였다. 세계여자절제회의 팅링 여사가 1923년 6월 한국을 방문하고 6개월간 체류하면서 여러 지역을 다니며 학교와 교회에서 강연을 실시하여 이 운동의 필요성을 고취하였고, 홍에스더, 유각경, 최활란 3 여성을 발기인으로 하여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1924년부터는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여 계몽운동을 실시하였고 각 지회를 조직하여 1926년에는 전국에 26개 지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약 3천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경남지방의 경우, 부산, 마산, 통영에, 경북지방에는 대구, 포항, 김천에 지부가 조직되었다. 1930년 1월에는 절제회의 회보라 할 수 있는 ‘절제’라는 잡지 창간호가 발간되고 1930년대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절제운동을 전개하여 시내 행렬, 전단지 배포, 금주단연 강습회 개최 등을 통해 이 운동을 확대했다. 절제회보는 1938년까지 8호를 발간했는데, 1935년부터는 절제운동도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된다. 금주 강연금지령이 내려졌고, 절제회의 활동이 제약을 받게된다. 1939년에는 절제회의 명칭도 일제의 강요로 교풍회(矯風會)로 개칭된다.
이런 절제운동은 기독여성들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적으로 확대되어 장로교의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1930년대 초부터 절제운동을 전개하여 1932년 5월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가 공식 창립되었다. 이 절제운동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금주단연운동을 실시하였고, 1933년에는 ‘절제시보’를 창간하고 주일학교를 위한 ‘절제공과’를 제작하여 국민정신을 계몽하였다. 특히 1935년 10월 15일에는 윤치호를 위원장으로 ‘미성년자음주금지법실시촉성회’를 조직하여 1938년 ‘미성년자 금주금연법’을 제정하게 만들었다. 또 구세군이 중심이 되어 절제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구세군은 ‘금주신문’을 창간하고 여러 문서를 통해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절제회가 먼저 조직되었고 이들의 활동이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금주단연가(禁酒斷煙歌)가 만들어지고 심지어는 찬송가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금주가 중에는 영문학자 양주동 교수가 쓴 이런 가사도 있었다.
1절: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 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절: 입에 더러운 담배를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다/
후렴: 술판을 깨치라/ 담배대를 꺽어 버려라/ 이천만 사람의 살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런 절제회의 활동이 금주 단연을 당연시한 오늘의 한국교회를 건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