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28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건 이글의 제목이며, 매우 중요한 명제입니다. 누가 물어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게 뭡니까?> 그러면 대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명제는 너무 당연해서 이상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명제를 제목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하셨을 때 많은 이들이 놀랐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존재와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서 그가 메시아인가를 질문했을 정도입니다. 많은 이들이 요한을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맥락의 말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매우 심각한 어조로 <선생님에게 세례를 받는 그 예수라는 이가 세례를 베푸는데, 사람들이 다 예수에게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로서는 이런 현상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왔는데, 이제는 예수님에게로 가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본문은 이 때 요한이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은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차 요한의 제자들은 이렇게 말해야 하겠지요. <여러분, 더 이상 우리 요한 선생님을 찾지 마세요. 우리 선생님은 예수님의 길잡이일 뿐입니다. 진정한 메시아는 예수님이니, 그 분에게로 가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요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그가 빈들에서 성장한 것,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은 것, 능력의 말씀을 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그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준 것 등이 아닙니다. 요한의 진정한 위대함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알고만 있었던 게 아니라, 본인의 입으로, 그리고 자기 제자들의 입으로 온 세상에 공표했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위대함이며, 동시에 요한이 후세에 끼친 최고의 공로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구주가 아닌 이를 구주로 혼돈하여 잘못 믿는 것을 방지하고, 올바른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믿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그가 침묵했다면, 사람들은 요한을 메시아로 믿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본질적인 것보다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릴 때가 많습니다. 초기교회 성도들은 예배당 건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배당을 짓는데, 물질, 마음, 시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배당 유지 보수에 열을 올리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믿는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유지 보수 위원회를 만들고, 운영규정을 만들고, 인선을 해서 조직을 갖춥니다. 그 과정에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고, 예수님을 믿는 기쁨과 감사는 사라집니다. 열심히 회의를 모이고, 일을 하지만, 구원받은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주변의 변두리적인 것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재정과 시설물 관리, 선교와 봉사를 위한 조직 운영, 노회와 총회 조직 운영 등은 예수님을 믿는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이심과 우리의 구주되심과 왕이심을 믿고, 천국의 백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만 집중하길 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