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여자절제회는 1923년 9월 조직된 이래로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했으나 1939년 일제의 간섭으로 ‘절제회’를 ‘교풍회(矯風會)’로 개칭하게 된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했다. 절제운동은 사실상 계몽운동이자 정신적 갱신운동으로 일종의 민족운동의 성격이 있었다. 일제는 술과 담배는 물론 아편까지 허용하고 있었는데, 여자절제회가 금주 단연운동을 전개하는 일에 대하여 내심 불만이었다. 저들의 우민정책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절제’라는 용어 대신 ‘교풍’이라는 용어로 명칭을 변경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절제회의 전통을 따라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50년에는 미국에서 열리는 절제회세계대회에 홍 에스더 여사를 파송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1952년 2월 24일에는 서울시 절제회를 조직한 이래 여자절제회 부산지회(3월 3일), 대구지회(8월 21일), 제주도지회(9월 27일), 인천지회(11월), 청주지회(12월 12일), 대전지회(12월 14일), 천안지회(12월 16일), 수원지회(12월 18일) 등이 조직되어 전국규모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1953년 1월에는 대한여자절제회연합회 창립30주년 기념식과 제1회 전국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전국대회는 ‘힘차게 재건하라’는 주제로 부산 보수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참가인원은 1,647명에 달해 대성황이었다. 이때 회장은 홍에스더, 유각경, 부회장은 남궁함라, 최활란 여사였고 총무는 황애덕 여사였다.
이때 절제회보 제1호가 다시 발간되었고, 보다 적극적인 절제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전쟁 유가족을 위한 희망원을 설립하였고, 적극적인 금주 운동을 전개하고, 축첩 반대, 국산품 애용운동 등을 전개했다. 이 당시 금주운동 표어가 “술 냄새 없는 곳에 민족의 향기가 있다”, “남은 피 흘리는데 그대는 술 마시는가?”, “술잔 깨뜨리고 새살림 빚어내자”, “생활 혁신은 금주로부터” 등이었다. 1955년 이후에는 생활간소화운동, 복장 간소화 운동, 소년절제회 육성, 절제회 청소년 지도자 수양회, 전국남여 중고등학교 학생 금주 웅변대회 개최, 서독과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된 세계절제회대회 대표단 파송, 기독교여성 선거계몽 강연회 개최 등을 실시했다. 1957년에만 서울 부산대구 광주 전주 마산 청주 등 전국적으로 56회의 절제강연회를 개최했다.
1960년대에도 이런 사업은 계속되지만, 특히 절제회보를 발간하고 축첩자 반대운동, 신생활운동을 전개했고, 양주 제조장 허가 반대 진정서 65통을 정부 요로에 전달하였고, 미신타파운동을 전개하였다. 따지고 보면 여자절제회는 정신계몽운동이자 민족개조 운동이었다. 이런 여자절제회를 이끌어 온 역대 회장은 홍에스더(1대), 신형숙(2대), 최활란(3대), 유각경(4대), 최활란(5대), 홍에스더(6대), 김성무(7대), 최금봉(8대), 여귀옥(9대) 여사 등이었다.
해방 이후 여자절제회 운동에 크게 기여한 이가 여귀옥(1923-2006) 여사였다. 대구 출신으로 신명여고를 거쳐 1939년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1년 청년사업가인 김수근 씨와 혼인하였다. 그가 여자절제회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초였다. 1952년에는 여자절제회 대구지회 이사가 되었고, 1957년 6월 11일 서울기독교연합회 회의실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는 주제로 열린 제20회 절제회연합회 전국대회에 여귀옥 여사는 김순해, 한재동 여사와 같이 대구지회 대표로 참석했다. 절제운동의 이념과 정신에 깊이 동감했던 여귀옥 여사는 1959년에는 사비로 대구절제회관을 구입하였다. 1962년부터는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연합회 이사로 봉사했다. 철저하게 성경중심적으로 사셨던 여귀옥 여사는 신앙생활도 모범을 보이셨고 1965년 서울 영락교회 권사가 된다. 1966년 1월 서울 동자동의 절제회관 부지 구입 때는 가장 많은 800,000환을 기부하였고, 1969년에는 절제회의 강단 단상의 책상을 헌납했다. 1970년 절제회관을 건축할 당시에는 건축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172평의 대지에 건평 262평의 회관을 건축하게 되는데, 여귀옥 여사의 헌신의 결과였다. 1971년 1월 25일 신축된 절제회관에서 모인 총회에서 여자절제회연합회 제11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회장으로 봉사했다. 특히 절제회관 건립 후에는 절제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는데 이 장학사업은 그 후 50년간 계속되어 각종 전문직 종사자들과 목회자들을 배출했다. 그가 회장으로 재임하는 기간동안 통상적인 절제회 사업 외에도 1980년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세계대회에 참석하면서 세계절제 운동에도 동참하여 국제적으로 헌신했다. 그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2006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는데, 뒤돌아보면 그가 절제회를 위해 일한 기간은 60여년에 달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고,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여 저명한 화가인 김영주 여사,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연세대학교 특임교수를 역임하신 김정주 박사, 제2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신 김성주 회장, 대성그룹의 김영훈 회장이 그 선대의 신앙정신을 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