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3(화)
 


서임중 목사.jpg

가을 단풍이 좋다는 지인들의 노래를 따라 한나절 산행을 했다. 그렇게 가을이구나! 했는데 겨울바람이 어느 새 문풍지를 흔든다. 이제는 단풍도 빛바랜 풍광을 보며 만상(萬象)이 떠오른다. 이전엔 법주사 앞을 지나려면 통행세를 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폐지된 지 반년이 지나면서 법주사 방문객과 등산객이 15% 증가했다는 보도를 듣는다. 자연이 무상으로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인데 그곳의 불법주차와 쓰레기도 함께 늘었다는 뉴스를 듣자니 우리의 문화생활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정서가 여전히 곱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문화생활, 공중 생활이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다. 35년 전 한일 역사 연구를 위해 3주간 일본에 체류할 때였다. 공중전화통 위에 지갑을 놓고 깜빡 잊고 나온 것이 생각나 4시간 만에 다시 가 보았다. 지갑은 놓아둔 그대로 있었다. 무척 감동을 받았던 터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대중목욕탕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수건을 2장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다음 사용자를 위한 배려로 자기가 사용한 곳을 말끔하게 정리정돈 하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대중식당에서나 공공장소에서는 큰소리 내는 일이 없고, 대화도 옆 사람에게 결례되지 않도록 조용조용 하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본의 한 모습이다. 스위스에서 본 일례로 비가 오는 날이었다. 식당에 일본인 단체 손님이 들어오는데 우산을 순서대로 줄을 세워 보관하는 것이었다. 보기 드문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산행을 하며, 불법주차에 불법 쓰레기 투여, 시골 장터 같은 카페 등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속까지 참담해지는 장면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는 표현처럼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물들었으면 좋겠다. 가을이 익어간다는 말처럼 우리의 삶도 성숙하게 다듬어져 갔으면 좋겠다.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한다. 인생의 초겨울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 깊어 가면 푸름을 자랑하던 모든 식물은 그 빛을 아주 잃고 생존한 일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봄이 오면 얼어붙던 땅을 헤집고 새로운 움을 틔우며 새 생명으로 탄생한다. 그 한 포기 풀을 통해서도 내 삶을 반추한다. 내 인생 또한 겨울을 맞이하면 이 땅에서의 내 삶도 마무리될 것이다. 나는 부활의 아침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그 나라에서의 삶을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서의 내 삶은 초겨울을 느낀다. 초겨울의 오늘을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가는데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축복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포항중앙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였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퇴근할 무렵이면 예배당 마당 한켠에서 나를 기다리는 분이 계셨다. 어느 한 주일도 예외가 없다. 입고 있는 옷은 1년 365일 똑같은 옷, 역사에 관한 것이라면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박한 사람, 그러나 아이들 말로는 항상 2% 부족함을 드러내는 분이다. 내가 현관에 나타나면 한달음으로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 나는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그분 손에 쥐어드리고 어깨를 한 번 감싸 두드려 주며 “밥 잘 잡숫고, 항상 감사하고, 아셨지?” 하면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쏜살같이 돌아서 달음질하곤 했다.

 

목사를 보고 싶어 하는 그분, 손에 만원을 쥐어 드리면 금방 얼굴이 환해지면서 천진스럽게 어린아이처럼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 분의 모습은 수천만 원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간애(人間愛), 순수함 그것이다. 나는 주일마다 그렇게 그분을 만났다. 말 한마디 없는 그 분은 수천만 마디를 눈빛과 표정으로 목사에게 말한다. 그러던 분이 어느 주일에 보이지 않았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혹여 늦나 싶어 차 안에서 잠깐 기다려 보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 편찮으신가?’ ‘설마…?’ 그러다가 다음 주일에 나타난 그 분을 보면서 괜스레 눈시울이 젖었다. “아픈 데 없지? 괜찮지?” 그러면서 그날은 2만 원을 손에 쥐어 드렸다. 목사는 그렇게 주일만 되면 만원으로 행복을 경험했다. 그분은 나에게 있어서 오늘의 예수님이었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보고 싶어 한걸음에 달려올 때 나는 주님을 보듯 반기고, 그것이 매 주일의 행복한 시간이 되었고 나도 매 주일 그분을 주님처럼 생각하며 보고 싶어진 것이다. 은퇴 후에는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당부, 갇힌 자들을 돌아보고, 목마른 자에게 한 잔의 냉수라도 내어주며, 헐벗은 자를 입히고, 아픈 자를 찾아 위로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해 주는 것은 유별난 행동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일 수도 있고, 때로는 문안 전화 한 통화일 수도 있으며, 흔히 쓰는 문자 메시지 한 줄일 수도 있다. 내가 기도할 때 한 마디의 중보일 수도 있고, 내가 먹는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사랑의 연주다. 그것이 나눔의 축복이다. 그것이 행동하는 믿음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유별난 계획을 세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날마다 오늘의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우리네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갔었던 동경의 ‘고시래’ 식당이 떠오른다. 수많은 손님이 식당 주인 배우 욘사마, 배용준 씨를 그리워하면서 ‘그분은 언제 오실까?’ 고대하는 마음으로 그 비싼 음식을 주문하여 먹고 있었다. 계절의 초겨울에 내 인생의 초겨울을 생각한다.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가는데 더욱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그러다가 다시 오시는 그 분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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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인생의 초겨울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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