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복, 결혼 후에는 남편의 성을 따라 박순복으로 불린 한 여성의 삶의 여정은 초기 경남지방 교회 역사의 한 단면이자 한 여성의 변화된 삶의 행로를 보여주는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김순복은 어떤 여성이었을까? 1892년 10월 12일 내한한 호주장로교 제2진 5명 중 여선교사 멘지스와 진 페리, 그리고 퍼셋은 부산진 죄천동에 거주하면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전도하기 시작했지만 이들의 첫 번째 사역은 고아원의 운영이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사업은 선교사 집에 버려진 아이 때문에 1893년 고아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고아원이 부산경남지방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Myoora)고아원이었다. 버려진 한 아이로 출발했으나 점점 수가 증가되어 2년 후에는 13명으로 늘어났다. 그 중의 한 아이가 김순복(金順福, 1887-1942)이었다. 6살 혹은 7살 정도 되었을 때 이 고아원에 오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부모도 알 수 없고, 어떤 환경에서 고아원에 수용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미우라에 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난 덕에 신앙교육을 받게 되었고, 멘지스가 시작한 일신여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성장한 김순복은 1905년 호주선교부를 도우며 매서전도인으로 활동하던 박성애(朴晟愛, 1877-1961) 라는 청년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때가 1905년 2월 15일이었고 18살 때였다. 남편 박성애는 28세였으니 순복이 보다 10살 연상이었다.
박성애의 혼인은 약간 늦었으나 당시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처녀를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맨지스는 자신이 양육한 순복이와의 혼인을 주선한 것이다. 결혼 예식을 주례한 이는 왕길지 선교사였다. 이때의 예식은 호주장로교 휘하의 주일학교를 위한 잡지인 「레코드 The Record」 18권 2호(1906. 2) 표지와 내지(10쪽)에 게재되었고, 신부 김순복이 에벤에셀교회 주일학교에 보낸 짧은 편지도 소개되어 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여러분들이 베풀어 주신 후원에 힘입어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가련한 소녀였으나 여러분들의 자상한 도움으로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입고 잘 살고 있고, 주야로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알게 된 점에 대하여 더 큰 감사를 드립니다. ... 비록 우리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항상 주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이 세상에서도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박순복.”
이때부터는 남편의 성을 따라 박순복으로 불렸다. 남편은 1877년 5월생으로 부산진구 범일동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출생했는데, 한문 사숙에서 수학하고 가업에 종사하던 중 내한한 서양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서 지금의 부산 동구 좌천동의 호주선교부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삶의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청년 박성애는 호주 선교사들과 접촉하게 되고 결국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게 되지만 처음에는 서양에 대한 호기심뿐이었다. 선교사들과 접촉하게 되지만 자기를 들어내려 하지 않았기에 여선교사들은 그를 ‘니고데모’라고 불렀다. 그러나 24세가 되던 1901년 초에는 분명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부산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01년 2월 10일에는 왕길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게 되는데, 자신의 아내가 될 김순복도 이 때 세례를 받았다. 그후 왕길지 선교사의 주선으로 대영성서공회 매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부산진교회 수요 예배 인도자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길을 가자 호주선교사 멘지스와 왕길지는 그를 순복이에게 소개하고 혼인하게 이끌어 간 것이다.
그런데 박성애는 호주의 첫 의료선교사인 휴 커를의 조수로 채용되었고, 커를 이사는 의사나 병원이 없는 서부 경남의 진주에 가서 일하고자 했다. 그래서 커를은 박성애 부부에게 진주로 같이 가서 일하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에 따라 이들은 1905년 10월 18일 부산을 떠나 진주로 향했다. 고아소녀였던 김(박)순복은 호주장로교선교부의 진주지방 개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때 부산을 떠난 이들로는 커를 의사와 그 부인 앤스티, 부산에서 얻는 큰 딸 사라와 둘째 딸 프란시스, 박성애 가족으로는 어머니 양주련, 박성애와 부인 김순복, 박성애의 남동생 박자룡 두 여동생 박은실과 박보렴 등 6 사람이었다. 선교사 가족 4사람과 총 10 사람이 늦은 가을 낙엽이 거리를 부산을 뒤로 하고 진주로 향한 것이다. 마산까지는 기차로 갔고 마산에서는 가마꾼의 도움을 받아 진주로 향해 20일 저녁 9시 30준 진주에 도착했다. 이날이 음력으로 9월 22일이었다. 이들 일행은 진주 성내면 4동 북만 안에 있는 정경철씨 소유 초가집에 임시로 거주하게 되었다. 김순복의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 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