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헨리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 1838-1913). 세브란스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오늘의 연세대학교 의료원인 세브란스 병원은 사실상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기여와 공헌을 기리며 의료시설이나 병원에서 세브란스라는 이름은 널리 원용되었고 부산에도 세브란스라는 이름이 포함된 의료 기관이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세브란스가 걸어갔던 거룩한 여정에 대해서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경제학자인 김학은 교수에 이해 세브란스의 전기가 출판된 것은 경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글의 중요한 정보는 이 책에서 얻은 것이다. 세브란스는 석유 산업가였고 자선가로 일생을 살았고, 특히 선교를 위해 통 큰 기부를 했기에 그는 ‘선교 자선가’(missionary philanthropist)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자선의 정신은 당대로 끝나지 않고 그후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아들 존 롱 세브란스(John Long Severance, 1863-1936)는 선대의 정신을 계승하였고 ‘세브란스 존 엘 기금’은 지금도 매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이자를 송금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통 큰 기부의 주인공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를 기억하는 일종의 도덕적 의무에 속한다.
세브란스 씨는 1838년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출생했다. 그와 석유산업에 이름을 떨쳐 석유왕으로 불린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 1839-1937)와는 친구사이였고 함께 일한 일도 있다. 세브란스씨가 석유산업을 시작한 것은 1864년인데, 당시 링컨 대통령 통치기였다. 그는 친구인 록펠러와 함께 1870년 스탠다드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를 설립했고, 26년 뒤인 1896년 스탠다드석유회사에서 사실상 은퇴하게 되는데, 그는 사업가로 성공했고 그는 자신의 재물을 공공의 익을 위해 기꺼이 기부하는 자선사업가로 명성을 얻었다.
널리 알려진 바처럼 그는 1900년 서울에 현대식 종합병원을 건립할 수 있도록 2만5천달러의 거금을 기부하여 1904년 병원을 준공하였는데, 이 병원은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었다. 여기서 시작된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과대학이었다. 그는 또 3만 달러의 의과대학 건물을 기증하여 1913년 준공할 수 있게 했다.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한국을 위해 기부하고 있지만 이를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의 좌우명이 “내가 주는 기쁨이 여러분이 받는 기쁨보다 더 크다”(You are no happier to receive it than I am to give it)는 것인데,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의미 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의 후원은 한국뿐일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세브란스 씨는 한국을 포함하여 만주, 중국, 일본, 태국, 버마, 인도, 필리핀 등 아시아 전 대륙으로 확산되었고,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수첩에는 후원을 약속하고 미처 이행하지 못한 미지급자선 명세표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그의 자선이 얼마나 광범위 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고 김학인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1900년 전 후 미국북장로교(PCUSA)선교본부가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어 한국선교부의 절실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적절이 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브란스 씨가 앞장서 거금을 기부하여 한국 선교사업의 물줄기를 트는데 기여하였고, 한국에서의 의료사업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번 한국을 방문했다. 그 때가 1907년 8월이었다. 그는 8월 26일 만주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는데, 그의 나이 70세였다. 이때 세브란스 씨는 32세의 젊은 주치의 알프레드 어빙 러들러 의사와 동행했는데, 1907년 1월 28일 고향인 오하이오 클리버런드를 떠나 세계일주여행을 떠난 지 7개월 되던 때였다. 한국에서는 서울, 평양, 선천, 재령을 거쳐 서울 인근을 거쳐 대구 부산을 방문하였다. 한국에서 3개월간 체류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한국을 방문한 이후에야 새로 건축된 병원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는 서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세브란스 씨는 한국 방문을 통하여 다시 전염병환자 격리병동, 외래병동, 의과대학 교사를 기증하였다. 그 외에도 남대문교회에 예배당을, 새문안교회에 오르간을 기증했고, 당시 부산에 어을빈 부인이 관장하던 규범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 교사도 세브란스 씨가 기증했다고 한다. 부산지방 교회사를 연구하는 필자가 김학은 교수 덕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세브란스 씨의 신념, 확신, 혹은 행동양식을 결정했던 기초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기 기독교 신앙이었다. 2대에 걸친 자선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되다”(행20:35)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러했기에 자신의 주치의 러들러 박사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고 그의 선교활동을 지원하기까지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