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실 때 제자들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기도이다. 이 기도는 무엇보다 남겨질 무리들, 즉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가 된 신자들을 위해 드려졌다. 얼마 후면 이들 곁을 떠나실 예수께서 남겨질 무리들을 위해 드려진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이 기도에서 두드러지는 줄거리는, 이 땅에 남겨질 무리들의 성격이다. 즉, 이 무리들은 고난 가운데서 진리로 보전되어 거룩하게 구별될 것이고, 예수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광을 이들이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사실이 있다. 그 영광이라는 것의 실체이다. 요컨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해지고 다시 신자들의 무리에게 계승되어진 그 영광은, ‘하나 됨’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교리를 통해서 ‘하나 된 교회’를 ‘우주적 교회’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 된 교회를 특정한 어떤 지역 교회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하나 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갖고 살다가 한 교회에서 만났다. 물론 우리는 하나의 구주와 하나의 아버지를 고백하였기에 교회에 모여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생각이 어떤 주제와 관점에서도 ‘하나’가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우리는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무리이다. 차라리,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무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다른 의견, 다른 생각, 다른 배경을 한 교회 안에 용납하지 않으려 해왔다. 동일한 취향, 동일한 배경, 동일한 계급, 심지어 비슷한 학력과 직업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그것을 하나 됨의 증표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효율성을 추구하는 결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보아도 좋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새 신자가 교회로 들어오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사도는 설교에 전념하고 행정은 비유대인을 포함한 일곱 집사를 세워 처리하게 한 것이다. 이는 다양한 혈통과 문화를 갖고 교회로 들어온 교인의 다양한 문제들을 유대교적 사고에 주로 익숙한 사도들에게만 맡기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즉, 교회의 다양성을 고려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에 이견이 없다는 말이 사실은 자랑이 아니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 예배당에 모여 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며, 한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받음 사실을 찬양하며, 다양한 삶의 정황 가운데 동일한 은혜로 승리케 하시는 성령님을 고백하는 일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장엄한 예배 가운데 나와 다른 내 옆의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자 해도 사랑할 수 없는 내 보잘 것 없음에 한탄하며, 어느 구석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면서도 같은 사랑을 받은 형제와 자매 가운데서 그만큼 사랑할 이유를 볼 수 없음으로 인해 통곡하고 부르짖는 처절함이 우리 가운데 없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끝으로 묻고 싶다. 혹시 나의 그 거북함 때문에, 그 불편함 때문에 나의 교회에 장애인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