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인류는 산업의 발전을 경험하면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큰 사고도 많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산업 현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31년도 미국의 보험 설계사였던 윌리엄 하인리히가 찾아낸 ‘하인리히 법칙’이 있습니다. 그는 산업 현장의 사고에 대해서 ‘1:29:300’이라는 비율을 제시합니다. 이 법칙은 ‘중대형 사고 1: 경미한 사고 29: 사고의 징후 300’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산업 현장에서 사람이 죽고 크게 다치는 정도의 아주 심각한 중대사고 한 건이 벌어질 때, 그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인리히의 연구에 따르면 이미 그 전에 같은 건으로 경상자가 29명 나왔었는데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이 일이 커져서 큰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 큰 사고가 나기 전, 가벼운 사고가 29건 일어나는 동안 이미 이 사고의 징후는 이미 300번이나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 이거 사고 날 것 같은데! 사고 날 것 같은데!”하는데도 이를 가벼이 여겨 고치지 않고,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서 특별히 돈이나 시간을 들여서 보수하지 않고 손을 보지 않으니까 그러다보니 “어? 또 사고 났는데!” 하면서 그 자리에서 예상되었던 사고가 생겨났고, 결국 그것이 쌓이다보니 사람이 죽고 회사와 사회에도 큰 손해를 끼치는 중상해 사건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하인리히 법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세상이 뒤흔들리는 커다란 사건은 반드시 그 이전에 수많은 징조와 징후를 통해서 간파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미리 우리의 위기를 대비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변화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징조와 징후가 산업현장만의 이야기일까요? 이는 우리의 믿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일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의 편에 서게 된 것은 어쩌다 갑자기 한 번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분명히 많은 징후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가볍게 여기는 적어도 29번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돌이켜보면 그 전에 벌써 300여 번의 번성과 돈과 성공에 집착하여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번에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지만, 돈이 귀하게 여겨지고 하나님보다 돈이 좋아질 때 빨리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기는 종교인들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믿음의 위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간절히 메시야를 사모하며 기도하는지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채 자신의 입장을 세우기에만 열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의 제 자리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징조와 표적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믿음을 다음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요? 하인리히의 법칙을 이제는 이것을 믿음의 법칙으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온전한 승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도 한 번에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전에 적어도 29번의 물질과 시간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바른 물질 사용의 회개가 있어야 하고 바른 시간 사용에 회개가 있어야만 우리는 온전한 믿음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데, 그걸 위해서 그 전에 많이 필요하고, 매일매일 필요한 건 바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즉 내 필요와 내 욕심을 조금 더 내려놓고 내 주위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물질에 대해 자유할 수 있고, 시간에 대해 자유할 수 있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