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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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폴리 아 되

감독 : 토드 필립스

출연 : 호아킨 피닉스(조커), 레이디 가가(할리 퀸)

 

다니엘 부어스틴은 [이미지와 환상]에서 현대인들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짜 사건 pseudo-event 에 휘말려 산다고 경고했다.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휴대전화를 통해 각종 미디어를 끊임없이 시청하고 있다. 드라마를 보고, 각종 연예 프로그램들을 보고, 스포츠를 보고, 개인 컨텐츠들을 본다. 현대인들의 이런 시청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회사나 개인은 지속적으로 컨텐츠를 생산한다. 미디어 속의 주인공들은 유명인이 되며 셀럽이 된다. 그들은 미디어에서 영웅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영웅은 가짜 사건일 뿐이다. 이미지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이 가짜를 진짜처럼 여기며 열광한다. 가짜들 이야기를 진짜처럼 여긴다. 한 번은 지하철에서 어떤 중년 여성 둘이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들리는 내용으로는 누가 죽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실제 사건이 아니라 드라마 상의 스토리였다. 얼마나 진지하게 이야기하는지 실제 사건인 줄 착각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실제 사건이 아닌 미디어 속의 가짜 사건을 진짜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미디어에 일희일비하면서 감정을 소모한다.

 

토드 필립스가 만든 조커 폴리 아 되는 현대인들의 이런 경향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감독은 전작이자 1편인 조커에서 새로운 영웅을 등장시킨다. 본명은 아서 플렉이지만 그는 조커로 불린다. 조커의 분장을 하고 스탠딩 코미디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그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대신 야유와 조롱을 보낸다. 무대에서 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아서 플렉 역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무능력하며 무기력하다. 사람들에게 조롱거리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아서 플렉이 일약 영웅으로 도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머레이 플랭클린 쇼에 나간 아서 플렉은 생방송 중 그를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든 진행자 머레이 플랭클린을 권총으로 저격한다. 이 장면이 생방송으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너무나 당황한 일에 아무도 대처하지 못할 때 아서는 당당하게 방송국을 빠져 나간다. 방송국을 빠져나온 아서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통쾌하다는 몸짓으로 춤을 춘다. 경찰은 그를 좇지만 이내 놓쳐버린다. 아서는 곧 지하철로 들어갔고, 지하철에는 조커 가면을 쓴 군중들이 가득하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발돋움하는 사건이다. 그는 자신을 조롱하는 머레이의 심장을 쏘았다. 살인 사건에 왜 사람들이 반응했는가? 실상 머레이는 성공한 부르조아의 대표다. 소위 잘난체하는 부류다. 아서와 같은 자들을 놀려 먹으며 인기를 누렸던 자다. 사람들은 그런 머레이를 정죄한 아서, 아니 조커에게 열광을 한 것이다. 그 순간 조커는 니체가 말한 초인이다. 도덕과 윤리를 뛰어 넘어 사회악을 처단한 영웅이다. 적어도 그를 추종하고 따르는 수많은 자들에게 조커는 영웅이다. 이제 사람들은 아서가 아닌 조커에게 열광하고 조커라는 가짜 인물에게 환호를 보낸다.

 

실제로 이런 조커 열풍은 현실세계에도 등장한다. 오늘날 정치가 그러하다. 사람들은 정치인에게 윤리와 도덕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조커처럼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고 그들의 정의를 충족해주는 새로운 영웅을 기대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욕을 대신 해 주고, 내가 휘두르지 못하는 권력을 휘둘러주고, 내가 감히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주는 영웅에 환호한다. 정치는 희화화되고 실제는 가짜가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이런 현상을 욕망의 모방이라 불렀다. 욕망은 퍼져 나간다. 급속도로 번져간다. 들풀처럼 욕망은 타들어간다. 너도 나도 욕망의 화신이 되면 사회 전체는 급격하게 비정상적으로 돌변한다. 독일 제3제국의 총통이 되어 온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히틀러 열풍이 그러하다. 그는 니체가 말한 초인을 자임했고, 당시 독일인들은 민족우월주의라는 욕망에 휘말려 그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했다. 결과는 자명했다. 남도 죽이고 자신들도 죽는 끔찍한 지옥이 연출되었다.

 

그래서일까? 토드 필립스 감독은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2편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옥에 갇힌 조커의 등장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부제인 ‘폴리 아 되’는 프랑스어로 ‘공유정신병 증세’라는 뜻이다. 아서의 정신병적 자아인 조커가 공유된다는 뜻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를 기대하고 있다. 그의 변호인은 그가 아서 플렉일 때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자아인 조커일 때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서 플렉과 조커는 분열된 자아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할리 퀸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조커에게 접근한다. 감옥 내 찬양대에 지원하여 조커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자신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한다. 외로웠던 아서 플렉,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서 플렉은 이내 그녀에게 사로잡히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아서는 할리를 사랑한다.

 

문제는 할리 퀸을 사랑한 아서 플렉의 마음이다. 그는 대중들이 원하는 조커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과 할리 퀸에게 한 남자인 아서 플렉으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 사이에 갈등한다. 사랑 때문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점차적으로 그는 대중들의 영웅인 조커에서 한 여인의 남자인 아서 플렉으로 순화된다.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에 있다. 할리 퀸이 사랑한 남자는 아서 플렉이 아니라 조커이기 때문이다. 할리는 아서 플렉이라는 소시민 코미디언은 관심이 없다. 조커라는 영웅이 필요할 뿐이다. 그가 마약 조커가 아니라면 할리는 그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 할리 퀸이 사랑하는 대상은 철저히 조커라는 만들어진 영웅이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군중들의 스폿 라이트를 받으며 세상에 억눌린 자들의 대변인이자 출구가 되어 줄 조커다. 조커를 통해 자신도 할리 퀸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현대인들의 이런 욕망을 영화의 스크린에 펼쳐놓았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영웅을 사랑하고, 스크린 속의 이미지화 된 영웅들을 추앙한다. 그들은 나의 욕망을 대신 해결해 주는 출구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가상의 캐릭터를 사랑한다. 가짜 사건에 일희일비하면서.

 

영화 조커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을 생각해 보았다. 2천년 전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도 영웅이 필요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영웅, 다윗의 무너진 왕좌를 재건할 영웅, 포로된 삶을 끝내고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게 해 줄 영웅이 필요했다. 이런 욕망들이 메시야 신드롬을 낳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해결해 줄 대상이 필요했고, 그러한 메시야 상을 만들어 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자일 뿐 아니라, 모세가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듯이, 지금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식을 제공하는 자라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 바로 그 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군중들의 욕망을 멀리하셨다. 오히려 물러가셔서 따로 기도하셨다. 그들에게 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강조하셨다. 그러자 그 많던 군중들이 다 물러갔다. 소수의 제자들만 남았다. 영화식으로 표현하자면 조커가 아니라 아서 플렉이 되었을 때 군중들은 떠나가고 그는 버림받았다. 예수께서도 욕망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욕망을 못 박아야 한다고 하셨을 때 버림 받고 성난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영화는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조커인가? 아서 플렉인가? 가짜 인물인가? 진짜 삶인가? 욕망의 투사인가? 십자가인가? 쓸쓸히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처럼, 가짜가 아니라 진짜 삶을 살 용기가 있는가? 나의 욕구를 채워줄 종교가 아니라, 나의 헌신을 바칠 진정한 신앙을 원하는가? 지금 당신은 누구인가? 

 

김양현 목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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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 폴리 아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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