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6(금)
 

김운성 목사.jpg

모든 목사님이 강단에 섭니다. 한 주간에도 많은 설교를 합니다. 한국교회 목사님처럼 많이 설교하는 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성경을 읽다가 많은 부담을 느꼈습니다. 저도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설교를 많이 하는데, 과연 그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내가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했는데,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누가 <당신이 이런 내용을 전했다고 하던데 맞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렇소. 내가 전한 복음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것입니다. 그는 확신 가운데 전했습니다. 사울표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자신이 전한 말씀을 굳게 지키고 헛되지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다른 분에게 가서 배우세요>라든가, <저도 제가 전하는 말씀이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답니다>라는 등의 흔들리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확신 가운데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청중들에게 강력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어떤 말씀이 선포되고 있을까요? 매우 다양한 주제의 설교가 선포됩니다. 가정생활, 경제생활, 인간관계, 욕망을 다스리는 법, 세상에서의 성취와 그 관리, 은밀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법, 성도의 올바른 정치관, 세계관, 통일에 대한 성도의 마음, 차별금지법 등에 대한 대응책 등, 다양한 주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제들이 구원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설교들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설교일까요? 아니면 옷에 장식품을 붙이는 것과 같을까요? 죽을 사람을 살게 하려면 입은 옷도 다 벗게 하고, 수술대에 눕혀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입은 옷에 장식품만 붙여주면 그가 살까요?

 

이런 의미에서 설교가 좀 더 본질에 접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강단에서 성도들을 보면서 혹시 이 예배가 생애 마지막 예배가 될 성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사에게도 마지막 설교일 수 있겠지요. 마지막이라면 부수적인 주변 주제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창작한 게 아닙니다. 15장 3절에서 그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라고 했습니다. 받은 것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1장 11~12절에서 말씀했습니다.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15장 3~4절은 이렇습니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성경이 뒷받침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이 모두 함께 읽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반박에 대해 성경으로 변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사와 성도 모두가 구원의 복음에 집중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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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우리가 전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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