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4(금)
 


이상규 교수 수정.JPG

  부산에서 첫 성탄절 혹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때는 언제였을까? 부산에 선교사가 도래한 이후 성탄절을 기념했겠지만 처음부터 한국인들이 성탄절을 알거나 이를 기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행사를 거행한 것은 『해은일록 海隱日錄』을 남긴 민건호(閔建鎬)에 의하면, 1884년 12월 25일(음력 11월 9일)이었다고 한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아 ‘야소 생일’이라고도 불린 이날 휴일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부산에서 성탄에 대한 첫 기록이다. 1891년 9월에는 북장로교의 베어드가, 10월에는 호주선교사 제2진 5명이 내부하게 되는데 이들이 부산에 온 이후 성탄절을 지키고 성탄절 날에는 선교사들이 모여 성탄 파티를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한국인과 같이 성탄행사를 거행한 것은 아니었다. 

 

  기록상으로 한국인들이 함게 모여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첫 기록은 부산진교회가 성탄절을 지킨 1900년 12월 25일이었다. 이날 성탄 예배에는 성인 60명, 아동 57명 등 117명이 참석했는데, 예배 공간이 협소하여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예배당 바깥에 앉아 예배드렸다고 한다. 이 때의 회집은 1900년 중 가장 많이 모인 예배였다고 한다. 

 

  1900년 11월 일 주일에는 남자15명, 여자 48명 등 63명이 회집했고, 12월 16일에는 50명, 12월 23일에는 64명이 참석했으나 12월 25일에는 117며잉 모였으니 평소의 두배가 회집한 것이다. 이때의 성탄 예배는 왕길지 목사 부임 이후 첫 번째 맞는 성탄절이었다. 이날 예배에 대해서 왕길지 목사는 자신의 일기에서 자세한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부산진교회 성탄 예배와 축하 성도들의 잔치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일기를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오늘은 무척 즐거운 날이었다. 아침에는 많은 선물에 특히 우리 아이들이 감격해 했다. 선교관은 (한국과 영국의) 국기와 중국식 등불, 초록 잎들로 장식되었다. 아침 일찍 날씨가 어떤지 보려고 나갔더니, 놀랍게도 우리의 한국식 교회 건물 위에 태극기 두 개가 나부끼고 있었고, 선교관 앞뜰에는 막대에 달린 초롱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예배 시간은 열시 반이었다. 이날 아침에 모인 성도들을 다 수용할 만큼 예배당 크기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날씨가 매우 따뜻하여 거의 여름 날씨 같아 감사했다. 그래서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마루에도 앉힐 수 있었다. 여자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교회 안에 앉고, 바깥쪽에는 남자 아이들이 앉았다. 몇몇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빨강, 파랑, 초록, 자홍색 비단옷으로 매우 아름답게 장식된 옷을 입었고, 심지어 청년들 중 몇 명은 긴 자홍색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왔다. 연로한 어른들 다수는, 크게 가난한 경우를 제외하면, 다 흰 비단옷을 입고 왔다. 모두가 가장 멋진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예배에 참석했다. 그 모습은 장관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 교인들이 성탄절을 ‘그리스도의 탄신일’이라고 부르며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예배는 짧고 멋지고 긴장감이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회중의 찬송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어른들은 비록 모르는 성탄 찬송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곡을 함께 불렀고, 남녀 아이들이 다 즐거워했다. 예배 후, 주일학교에 개근한 아이들에 대한 시상이 있었다. 큰 아이들은 최근에 번역된 한글 신약전서를 받았다. 우리 돈 원가로는 1실링에 불과한 책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지금 너무 가난해서 그들에게는 이 성경이 호주에서 열 배나 비싼 책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 어린 아이들은 석판과 색종이로 감싼 석필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그 후 선교사 부인들이 교인들 각 사람에게 땅콩, 일본 사탕, 일본 과자 두 개, 오렌지 한 개가 든 종이 봉지 모양의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출석한 사람 모두가 그런 선물 봉지를 하나씩 받았고, 몇몇 사람에게 오후에 몸이 약하거나 아파서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선물봉지를 들려 보냈다. 분배된 종이 봉지는 전부 160개였다. 모임 시작 때 계수한 인원은 여자 아이가 30명, 남자 아이가 27명, 여자가 48명, 남자가 12명이었는데, 그런 차이가 난 것은 어머니나 큰누나가 데리고 온 어린 아이들이 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자 선교관 앞과 교회 앞마당에 등불을 밝혔다. 남자 아이들이 마당에 모여 교사들과 장년들 몇 사람의 지도에 따라 등불 아래서 여러 가지 게임을 즐겼다. 그 등불이 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의 명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오늘은 우리가 매우 잘 어울렸던 날, 교인들 각자가 행복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보여준 날이다. 과연 저 옛날 베들레헴 들판에서 선포되었던 천사들의 노래가 여기서도 성취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상규, 『왕길지의 한국선교』, 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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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부산에서의 첫 성탄절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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