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직분이 아닌 직분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사모다. 임명을 받은 것도 아니고, 교회의 조직이나 교단의 헌법에도 없는 참 어색한 이름이다. 사실 아무런 실권도 없는데 성도들의 요청과 요구는 너무 많다. 교회의 그 어떤 조직이나 회의에도 들어가지를 못한다. 남녀기관의 회원도, 제직도, 당회원도 아니다.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봉사직에 지원할 수가 없다. 더욱이나 선출직에는 아예 피택과 선택의 자리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하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 성도들도 교회의 모든 일에 사모가 다 참여하기를 원한다.
남편인 목사는 사명자로 부름을 받고, 신학교를 나오고, 정규직으로서의 훈련도 긴 시간 동안 받았다. 그러나 사모는 사모 신학교를 나온 것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다.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그 남자가 신학교를 가고 목회자가 되었다. 아니면 신학교를 졸업한 남자를 만났는데 목사였다. 그러니까 사모는 소명도, 부르심도 아닌 상태에서 결혼과 동시에 그냥 성도들이 사모라고 부르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자 부교역자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부임한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원래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출석하면서 직분을 감당해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남자 부교역자의 아내는 남편이 사역하는 교회에 함께 다녀야 한다.
사모가 청년 시절에는 그 교회에서 촉망받는 젊은이였고, 또래의 무리 가운데서 제일 신앙이 좋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사모가 되면 재능과 은사에 관계없이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교회의 봉사직은 없다. 봉사자가 없는 사역의 빈자리를 채우거나 결석하는 봉사자의 뒷자리를 감당해야 한다.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을 정도의 사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사모가 직장에 다니면 성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죄하고 비난하는 공동체도 있다.
교회 안에서 처신하기도 정말 어렵다. 교회마다 요구하는 내용이나 수준이 다 다르다. 열심히 공동체에 참석하면 나댄다거나 설친다고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모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말을 조금 많이 하면 입만 살았다고 하고, 말이 없으면 꿔다 둔 보리 자루라고 말한다. 심방을 가서 세 번 칭찬하면 사모가 가지고 싶어서 계속 말한다고 하고, 칭찬하지 않으면 성도의 삶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봉사를 열심히 하면 성도들의 자리를 빼앗는다고 하고, 봉사를 안 하면 놀고먹는다고 한다. 옷을 잘 차려입으면 사치한다고 하고, 검소하게 입으면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폄하한다. 교인들과 조금 친하게 지내면 자기 사람 만든다고 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사교성이 없다고 말한다. 자녀들이 교회에서 떠들면 가정교육이 엉망이라고 말하고, 엄격하게 훈육하면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목사인 남편이 목양을 잘하면 무슨 복이 저리도 많아서라고 하고, 남편이 목회를 잘못하면 도대체 사모는 뭐 하느냐고 말한다. 남편이 목양을 잘하면 남편의 실력이고 목양을 잘못하면 사모는 자신의 부족함 같아서 늘 마음이 아프고 냉가슴을 앓는다. 사모의 몸이 자주 아프면 기도하지도 않고 목사의 목회에 방해가 된다고 하고, 건강하면 아픈 사람들의 삶을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서 사모는 오늘도 마음과 정신과 육체가 아프다. 젊은 시절의 자존감이 사라졌다. 평생에 축복을 선포하고 기도했는데 소수를 제외하면 정작 사모는 가난하다. 교회에서 어쩌면 그냥 시간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목회가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물론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하고, 남편의 목회를 힘들게 하는, 위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사모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모는 교회와 목회와 남편에게서 소외 된 채 외롭고도 힘든, 사명과 사랑과 동역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참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힘내라는 말 대신에 그냥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가만히 쳐다봐 주면 참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