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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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목사들 가운데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와 무신론 공산주의가 동시에 동가적으로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할 수 있을까? ‘황금 송아지’(The Golden Cow)라는 책을 쓴 존 화이트(John White)는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하나님 아닌 어떤 피조물을 섬기든지 그 어느 하나만을 섬기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어떤 것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무신론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실제로 한국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들이 없지 않았다. 존 화이트의 주장에 근거한다면 이들 좌익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는 진실된 의미의 목사라고 볼 수 없다. 그 한 사람이 최문식 목사였다.


  최문식의 행적은 6.25전쟁기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로 입성하자 친북조직인 ‘기독교민주동맹’이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김창준(金昌俊) 목사였다. 평남 강서 출신으로 숭실학교와 일본 아오야마 가꾸인(靑山學院) 출신인 그는 감리교 목사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24년에는 미국 유학을 하고 1926년 귀국하였는데 해방 이후 좌익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했는데 이 환영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장로교 대표가 바로 최문식(崔文植, 1905-?)이었다(민경배, “해방70년과 남북통일의 문제,” 「개혁논총」 36호<2015>, 22). 


  최문식은 1939년 3월 28일자로 평양신학교 34회로 졸업했다. 일반적 관례로 본다면 1936년 4월 입학한 것으로 보이고,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평양신학교가 사실상 폐교되었기에 졸업식을 하지 못하고 통신으로 졸업장이 수여된 경우였다. 그의 동기들이 경남지방의 한대식, 이수필, 주상수 등이고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합동측의 지도자가 되는 김윤찬, 통합측의 총회장이 되는 김종대 등이 동기였고, 공산주의자가 되는 이재복도 그의 동기였다. 최문식의 행적은 해방 이후 드러나게 되지만 그는 이미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적으로 경도되어 있었다. 그는 1923년 11월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무정부주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바 있었고, 1930년 7월에는 조선청년동맹 평남연합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32년 9월에는 대구노동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조합정리부와 종교부를 담당했다. 대구노동자협의회는 앞에서 언급한 이재복, 조홍기, 김병창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혁명적 대중운동 결사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목회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는 한편, 조선인민당 대구지부 간부를 역임하였고, 1945년 10월에는 경북도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부위원장 겸 내정부장이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처럼 그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다.


  그러다가 최문식은 1946년 10월 대구의 철도파업이라는 폭동을 배후 조종하고 이에 가담한다. 미군정기인 1946년 9월 조선공산당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일으켰는데, 9월 23일 부산지역 철도 노동자의 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9월 24일부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주도로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연대투쟁에 들어갔는데, 10월 1일에는 대구폭동사건으로 번져갔던 것이다. 대구 폭동은 인명 피해가 적지 않아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고 치안상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 대구 폭동은, 해방 이후 정판사 사건, 1948년의 여수 순천 반란 사건, 제주 4·3사건과 함께 해방 이후 남한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갔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류된 이들이 이재복, 최문식 같은 목사들이었다. 


이 일로 최문식은 제5관구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이후 10월 항쟁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징역 3년형(5년 형이라는 설도 있음)을 언도 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 친구로 후에 YMCA 총무로 일하게 되는 김태묵 목사가 당시 미군정청 고위 관리로 있어서 그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발생한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다시 구금되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자 석방되었다. 그리고는 서울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가담했다. 이런 충성에도 불구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구역사문화대전에 의하면, 마포형무소 복역 당시 전향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북한 당국에 끌려다니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목사직을 버리고 좌익 친북 활동에 목숨 걸었으나 결국 그들에 의해 버려진 존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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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공산주의자가 된 최문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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