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2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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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정략적 고려에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바 있고, 1945년 10월 21일 행한 방송 연설에서, 경제적인 면에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과는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 바 있으나 이런 시사는 정략적인 의도였다. 1945년 12월 17일과 19일 행한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연설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진심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공산당 내의 친소파당원들을 소련의 세계적화 정책에 농락당한 반민족적 이기주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1946년 1월 13일 좌우합작을 위한 5당 회담이 결렬되자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공산분자와 합동이 사실상 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성의를 다해 왔으나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떻게 한길 갈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재차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 후 동서냉전이 악화되자 공산당은 계급 간 알력을 조장하고 계급투쟁을 선동한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1949년 5월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서의 반공운동은 ‘세계 모든 자유민들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할 명분으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했다. 이것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혹은 건국과 함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반공체제 구축을 위한 새로운 이념 제시였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6.25 전쟁 이후 심화되어, “공산주의와는 절대로 함께 살 수 없다”는 보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발전했다. 이런 이승만의 신념은 그 시대의 보편적 가치로 수용되었다. 그것은 북한에서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경험적 확신이자 6.25 전쟁을 통해 얻는 교훈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전쟁기까지 100만이 넘은 월남 인구도 반공주의의 심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우리나라는 건국 전후 좌익세력의 건국준비위위원회 활동, 좌우합작운동 혹은 박헌영의 인민공화국의 선포, 신탁통치안에 대한 좌우익의 대립, 미소공동위원회, 남한에서의 좌익 활동,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 남북협상, 5.10 총선거 등 고비 고비마다 한반도는 이념적 경계에서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다.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소련의 기도, 남로당의 활동,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무지 가운데 남한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반공 체제를 구축한 것은 이승만의 지도력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미군정은 공산주의와의 대립보다는 타협을 원해 좌우합작을 선호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 충돌하면서까지 소련편에 선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끌었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적 가치, 국제 정치 질서에 대한 인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 그리고 공산주의의 허구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초한 것이었다.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건국투쟁에서 3개의 이념 구릅이 대립하고 경쟁했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우익진영이었고, 둘째는, 공산주의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좌익 진영이 있었다. 셋째는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중간파 집단이 있었다. 임시정부 구성원 중에서도 우파는 우익진영을, 좌파는 공산진영을, 일부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거나 참여했다. 이런 혼란과 대립 가운데서도 자유민주의 공화제 정부를 건국한 것은 이승만의 공헌이라 할 수 있고 특히 그의 반공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반공 노선은 그의 건국 사상이라기보다는 그가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의 소극적인 측면이었지만, 그가 청년 시절부터 가졌던 반로(反露)사상은 약 60년 이후 전개되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지침이 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승만은 1898년 3월 19일자 「협성회회보」에 기고한 논설에서 제정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지금의 영도) 조차 기도를 비판하여 이를 좌절시킨 바 있고, 그 후 한성감옥에서 쓴 한문논설에서, 그리고 1904년 2월부터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자신의 『독립정신』(1910)에서 반로사상을 피력한 바 있다. 러시아에서의 공산혁명과 공산주의의 확산, 소련에 의한 북한에서의 공산화, 그리고 한반도 공산화를 기도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승만의 반로 사상은 시대를 앞서가는 성찰의 결과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사상은 김재준 한경직 손양원 김홍도 김준곤 조용목 목사 등 교계지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한국교회는 반공주의적 성격을 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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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이승만의 반공주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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