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중국동북지방은 <연변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번에 다섯 번째로 연변지역을 방문하면서 보다 깊이, 보다 책임감 있게 연변에 대하여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연변지역을 중심한 중국의 지금 동북지방은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출발과 삶의 첫 번째 터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이 처음 여기서 출발하였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부여, 옥저라는 이름으로 나누어져 살다가 고구려가 이들을 통합하면서 나라(국가)다운 나라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으로는 역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백제와 신라가 나라의 기틀을 세워 나갔다. 그 결과 일컬어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시대>가 열려 아시아동북지역은 우리 한민족에 의하여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면서 세 개의 나라가 700여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다가 AD 660년에 백제가,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에 의하여 정복되면서 아시아 동북지역의 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는 <통일신라>라고 부르고 있지만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정복은 당했으나 실상은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신라의 통치권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고구려가 가꾸어 놓았던 저 광활한 송화강, 목단강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던 기름진 땅은 그 때 이후로 우리 한민족의 영역에서 멀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에 우리 한민족의 영토는 최고조에 달했었는데 지금은 역사의 안타까운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 후 우리는 지금의 압록강, 두만강을 북쪽 국경으로 하는 말 그대로 <한반도 3천리>만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1870년대 말, 함경도 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 조선왕조는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어 조정의 통치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극심한 흉년에다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시달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불쌍한 백성들은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1870년대의 두만강 이북 땅은 청나라의 행정력 또한 제대로 미치지를 않아 거의 방치상태로 버려진 땅이었다. 함경도 지역의 우리 조상들은 고향에서 굶어서 죽느니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변 땅으로 들어가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드문드문 청나라의 국경 경비대들이 있었으나 먹고 살 길을 찾아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청나라 군대의 위협과 천대 멸시를 온 몸으로 감수하면서 방치되고 버려진 그 땅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토굴과 토담으로 된 움막을 짓고 참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삶>을 시작하였다. 함께 모여 이웃을 이루고 마을을 이루면서 황무지를 파헤쳐 씨를 뿌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여기 저기 자그마한 논밭이 일구어지고 가을이 되면 수확을 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 저 연변 땅은 우리 한반도 남쪽의 기름진 당과 너무나 흡사하게 옥토로 변모 되었다. 나는 이번 방문길에서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맨손으로 피땀 흘려 일구어 가꾸고 넓혀왔던 연변의 논과 밭은 140여년이 지난 지금 아름답고 탐스럽기가 그지없어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고구려가 가꾸어 놓았던 저 광활한 송화강, 목단강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던 기름진 땅은 그 때 이후로 우리 한민족의 영역에서 멀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에 우리 한민족의 영토는 최고조에 달했었는데 지금은 역사의 안타까운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 후 우리는 지금의 압록강, 두만강을 북쪽 국경으로 하는 말 그대로 <한반도 3천리>만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1870년대 말, 함경도 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 조선왕조는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어 조정의 통치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극심한 흉년에다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시달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불쌍한 백성들은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1870년대의 두만강 이북 땅은 청나라의 행정력 또한 제대로 미치지를 않아 거의 방치상태로 버려진 땅이었다. 함경도 지역의 우리 조상들은 고향에서 굶어서 죽느니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변 땅으로 들어가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드문드문 청나라의 국경 경비대들이 있었으나 먹고 살 길을 찾아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청나라 군대의 위협과 천대 멸시를 온 몸으로 감수하면서 방치되고 버려진 그 땅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토굴과 토담으로 된 움막을 짓고 참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삶>을 시작하였다. 함께 모여 이웃을 이루고 마을을 이루면서 황무지를 파헤쳐 씨를 뿌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여기 저기 자그마한 논밭이 일구어지고 가을이 되면 수확을 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 저 연변 땅은 우리 한반도 남쪽의 기름진 당과 너무나 흡사하게 옥토로 변모 되었다. 나는 이번 방문길에서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맨손으로 피땀 흘려 일구어 가꾸고 넓혀왔던 연변의 논과 밭은 140여년이 지난 지금 아름답고 탐스럽기가 그지없어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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