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세대칼럼] “문제아”가 아니라 “한 영혼”입니다
위기 청소년을 향한 교회의 시선
필자는 11년 전부터 위기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다. 가출 청소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학업중단 위기의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보낸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그만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며칠 전, 필자의 센터에서 만난 한 아이의 말이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다. “센터장님, 교회는 제가 오면 싫어해요. 제가 문제아 같아서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던 그 아이의 눈빛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아주 작은 기대가 섞여 있었다. 교회는 과연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고 있는가? 아니, 처음부터 환영했는가?
‘위기 청소년’이라는 말은 흔히 비행 청소년과 혼용되곤 하지만, 그 의미는 훨씬 더 깊고 넓다. 협의적 개념으로는 폭력, 강도, 절도, 음주, 흡연, 가출, 약물 남용, 성비행 등 반복적으로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을 말한다. 그러나 광의적 개념은 더 본질적인 위기를 포함한다. 즉, 사회가 부여한 가치관과 충돌하거나, 청소년 자신이 삶의 존엄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상태에 있는 이들을 말한다. 오늘날, 위기 청소년의 문제는 더욱 복합적이고 가속화되고 있다. 중독(게임, 도박, 약물), 성 문제, 자해와 우울, 가족 해체, 경제적 빈곤, 정서적 방임, 학교 부적응 등 다양한 위기가 얽혀 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면은 무너져 있는 청소년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때로는 조용히 ‘사회적 실종’ 상태로 빠져든다.
최근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촉법소년’ 제도 역시 위기 청소년을 둘러싼 오해와 분노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만 10세에서 14세 미만의 소년은 형사책임을 지지 않고 보호처분의 대상이 되는데, 사람들은 이를 ‘처벌받지 않는 범죄자’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제도의 본질은, 아직 미성숙한 아이에게 형벌보다 교화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문제는, 교화와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사회 시스템이 없다는 데 있다. 부모의 책임은 강화되지 않았고, 가정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며, 재범 방지를 위한 교육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비난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향하고, 아이들은 점점 더 구석으로 밀려난다.
이쯤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교회는 지금 위기 청소년 곁에 있는가? 현실은 다소 냉소적이다. 많은 교회는 위기 청소년을 환영보다 ‘관리’하거나 ‘배제’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예배 시간에 늦게 오고, 예배 중에 떠들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문신을 한 청소년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속으로 말한다. “다른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 결국, 이들은 조용히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문제아’라는 이름표만 남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 병든 자와 죄인을 먼저 찾아가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마가복음 2:17) 예수님의 공동체, 곧 교회는 가장 연약한 자가 가장 먼저 안식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회복해야 할 때다.
위기 청소년 사역은 선택이 아닌 사명이다. 교회는 이들을 상담하고, 격려하고, 믿어주며, 무엇보다 지지해주는 어른들이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실천 가능한 방법은 생각보다 많다. 교회 공간을 청소년 쉼터로 열자, 전문 상담가, 지역 연계 멘토링 프로그램을 도입하자, 소그룹, 문화체험, 미술·음악 치유 활동을 운영하자, 그리고 모든 성도가 한마음으로 청소년의 지지자가 되는 문화를 만들어가자, 우리는 그들의 상처를 다 알 수 없지만, 그 상처 곁에 함께 있어 줄 수는 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셨다. 오늘날 교회가 잃고 있는 그 ‘한 마리 양’은 위기 청소년들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손 내밀지 않는다면, 세상도, 학교도, 가정도 그들을 품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회가 먼저 손 내밀 때,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라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