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부분 장로교회에 지금 있는 교회법은 어디서 왔을까? 물론 원리는 성경에서 왔다. 또 16세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았다. 근데 직접적으로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에서 작성한 교회법에서 왔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5년 7개월에 걸쳐 1163회를 모였다. 처음에는 목사가 121명, 상원의원이 10명, 하원의원이 20명으로 총 151명이었다. 첫 모임 한 달 후인 8월 17일에 스코틀랜드와 맺은 ‘엄숙한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목사 5명(알렉산더 헨더슨, 로버트 베일리, 사무엘 루더포드, 조지 길레스피, 로버트 더글라스)과 장로 3명이 파송되므로 회원이 159명으로 늘어났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법적으로는 총회의 소집과 해산, 총회의 구성과 회의 진행 등 모든 권한이 의회에 있었다. 당시 교회는 왕과 의회의 지배 아래 있었다. 총회는 단지 의회에 조언을 해주는 기구에 불과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잉글랜드 의회에 의해 소집된 종교회의였다.
바로 여기서 교회법, 특히 장로회 교회정치가 확정되었다. 당시 총회에는 감독정치, 회중정치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총회의 구성원이 다양했기 때문에 확정하기까지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국가가 교회 위에 있다고 여기는 에라스투스파들과도 상대해야 했다. 심지어 장로회 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즉 영국 장로회주의자들과 스코틀랜드 장로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었다.
회중정치를 주장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 “성경이 교회의 정치에 대해 과연 말하는가?” 위원회는 다음 질문을 염두에 두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1) 신약에서 어떤 직분이 언급되는가? 2) 어떤 직분이 임시적이고 어떤 직분이 항존하는 것인가? 3) 어떤 호칭이 각각 그 직분에 속하는가? 4) 항존 직분의 내용은 무엇인가?
성경의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토론이 이어졌다. 1643년 11월 2일부터 21일까지는 목사와 교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두고 토의가 있었다. 총회는 회중정치에 반대하여 목사와 별개로 존재하는 교사의 직분은 성경에 근거가 없음을 결정했다. 그러나 한 교회에 목사가 두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은 설교를 다른 사람은 교육을 맡을 수 있게 했다.
이후 12월 8일까지는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의 차이에 대해서 토의했다. 성경에 두 종류의 장로-즉 말씀과 교리에 전념하는 장로와 권징을 시행하는 다스리는 장로-에 대한 증거는 있으나, 총회는 다음과 같이 절충했다. 성경이 다스리는 장로를 말하고는 있으나, 이것이 임시 직원인지 아니면 항존 직원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결정했다.
가장 중요한 토론은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의 권위에 대한 것이었다. 장로회주의자들과 회중주의자들이 대립했다. 이는 지역교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지역교회가 단독으로 목사를 안수하고 임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등이었다. 수많은 토의를 거쳐 목사 임직은 노회의 권한이며, 치리회 결정에는 신적인 권위가 있다고 결정했다. 1644년 4월 20일에 <목사임직 지침서>가 의회에 제출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영국 땅에서 총회가 모여서 확정한 4개 교회법 문서(신앙고백서, 교회정치, 예배지침, 대, 소교리문답)를 정작 영국의회는 승인하지 않고, 나중에 총대 8명을 보내며 합류한 스코틀랜드 총회가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언약에 따라 소집된 양국의 공동총회로 인정하고 이를 수용했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교회가 이 교회법을 수용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고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신 신비였다. 1660년 영국 교회는 왕정복고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모두 폐기하기 때문이다. 그때 스코틀랜드교회들이 채택한 바로 이 교회법 문서들이 미국교회를 거쳐 한국교회에 전파되어 한국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이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요 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