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0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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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틴 루터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종교개혁가이다. 당시 교회의 부패를 잘 보여준 ‘면죄부’(면벌부)를 주제로 토론할 목적으로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당 문에 95개 조항을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도화선을 이루어냈다.

 

루터가 쓴 여러 책 중에 <소교리문답>(1529년)이 있다. 십계명,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등을 중심으로 해설했다. 그런데 루터눈 이 책 서문에서 자신이 왜 교리문답을 작성하는지 이유를 밝혔다. “근간에 내가 여러 곳의 교회를 시찰(視察)하고 신자들의 비참한 신앙생활을 목격한 나머지 극히 쉬운 문장과 적은 책자로써 준비된 교리문답서를 내놓아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도록 했다. 아! 불쌍하도다. 내가 직접 본 비참한 상태를 슬프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저들은 스스로 신자라고 말하며 세례를 받았다고 하며 주의 성찬을 받으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 결과 무지한 가축과 이성적이지 않은 돼지처럼 살고 있다. 복음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남용하는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였다.”

 

루터가 왜 저렇게 탄식할까? 대체 무슨 일이 있은 것일까? 종교개혁은 복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중세교회에서 변질한 교회시찰을 회복했다. 여기에 앞장선 이가 루터다. 교회시찰은 본래 사무엘, 엘리야(삼상 7:17, 10:8; 11:14; 13:8; 15:1; 열왕기상 17-21장) 등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모범을 보이고, 고대교회도 이를 실행했다. ‘시찰’은 교회를 ‘두루 다니며’(‘시찰’) 상태를 살피고 돌보며 악을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행 15:36, 16:4, 18:23, 고전 4:19, 17:5-8 등).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41). 그런데 이 시찰이 중세교회에서 크게 변질하고 부패했다.

 

루터와 지역 교회는 이 시찰을 다시 회복했다. 그런데 시찰을 시행한 결과는 처참했다. 신자들이 세례받았다고 하면서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을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짐승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복음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남용하는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였다고 개탄했다.

루터는 동역자 멜란흐톤을 통해 “선제후령의 삭슨지역에서 목사들에 대한 시찰위원 지침”(1528년)을 작성하도록 했다. 서문은 그가 직접 작성했다. 서문에서 루터는 시찰의 실례와 원리, 역사를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다시 우리에게 오게 되었지만, 이제 시찰과 감독의 관행이 다시 세워져야 할 것을 호소했다. 실제로 교회시찰은 2-6년마다 시행되고, 교회재산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리, 당회의 규정, 각종 명부(교인, 성찬, 세례, 혼인, 장례, 성찬 참여자 등)을 살폈다. 목사, 당회, 회중을 시찰하기 위해 특별히 18개 항목을 작성했다. 거기에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 세례, 회개, 성찬, 여러 기도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시찰에 앞서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소교리문답>이다. 소교리문답 내용은 시찰 내용과 흡사하다. 아마 교회시찰이 없었더라면 소교리문답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계속되는 교회개혁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교회개혁을 위해 성경과 사도의 본을 따라 루터가 앞장서 회복한 시찰, 오늘날 노회가 맡은 가장 중요한 기능인 교회시찰이 형식에 그치고 중단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1922년)부터 헌법에 부록으로 수록된 <시찰 위원 특별심방시 문답 실례>를 삭제한 교단도 많다. 노회 직무 중 하나는 시찰위원을 두어 관내 교회를 시찰하는 것이다.

교회개혁을 위해 시찰을 교회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회복한 말틴 루터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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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말틴 루터(1483-1546)와 교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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