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촌에서 태어나고 촌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뒷집과 앞집은 그냥 우리 집과 마찬가지였다. 앞집에서 부침개를 하면 고소한 냄새와 함께 따뜻한 부침개가 우리 집의 담을 넘어 온다. 뒷집에 손님들이 오면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아주 맛있는 인절미가 우리 집의 담을 넘어 온다. 그래서 우리 집 앞뒤에 사는 분들의 모든 것들을 거의 다 알 수 있었다. 그 집 식구들과 그들이 그 날 저녁에 먹은 음식까지도 웬만하면 다 알았다. 심지어는 부부가 싸우는 소리까지 다 들리니 싸움의 이유도 알았고, 깨어진 그릇의 개수나 종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유는 서로의 경계를 확인하는 담이 낮았기 때문이다. 키 작은 내가 발의 뒤축을 들지 않아도 충분히 넘나다볼 수 있을 만큼 담이 낮았다. 학업의 문제로 내 고향의 담장 낮은 집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집의 앞뒷집은 공간적, 시각적, 후각적, 감정적, 관계적으로 그냥 우리 집이었다.
그런데 학업을 따라 시작 된 도회지의 삶은 그렇지를 않았다. 내가 사는 집의 앞집에는 누가 사는지, 뒷집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담이 높은 것이 아니라 아예 담이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냥 벽이었다. 어느 곳 하나 소통 할 수 있는 틈이 없었다. 아주 작은, 그러나 언제나 굳게 닫힌 철문만이 우리 집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우리 앞집이나 뒷집에서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에도 아주 싸늘하고 감각 무딘 철문이 존재할 뿐이었다. 직장을 따라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내 집은 내 집, 앞집은 앞집, 뒷집은 그냥 뒷집이었다. 아직도 나는 모른다. 그 집들의 식구와 그들이 즐겨 먹은 음식을. 높은 담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높은 담보다 더 높은 벽이 사방팔방으로 철옹성을 이루고 있었기에. 아마 그들도 자기들의 옆집에 있었던 나를 인식하지도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일들을 감당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의 흐름은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이다. 세상살이에 지혜(영악)로울수록 마음의 담은 높아진다. 나이가 들수록 관계의 담은 단절의 벽이 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스스로 만든 감옥의 철옹성 안에서 늙은 사자처럼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배회한다. 그로인해 점점 주변에 사람이 없고, 우정이 없고, 의리가 없고, 삶의 향기가 없어진다. 존재하는 낮은 담도 허물어야 우리가 있는데, 오히려 낮은 담을 높이고, 높은 담을 벽으로 만드니까 모두가 다 외롭다. 그렇게 하고서는 또 서로가 서로를 향해 “사람이니까 외롭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자위한다.
원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담이 없었다. 에덴에서 대화하고 동행했다. 서로를 완벽하게 알았고 허물없이 교제했다. 그런데 미혹과 교만이 들어오는 순간 인간이 스스로 나무 아래에 숨어 잎사귀로 자신의 몸을 가리는 낮은 담을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대화할 때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제법 높은 담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소통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피하였다. 그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벽을 만들었고, 그것은 결국 인간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굳은 벽을 파하셨다. 예수님께서 파담자, 파벽자가 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구원의 은총이다.
파벽자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교회와 세상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수많은 담과 벽을 만들어서 자신과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있다. 예수님은 담을 허셨는데 우리는 담을 쌓고 있는 것이다. 담을 쌓으면 안 된다. 그것은 모두에게 손해다. 시대는 예수님처럼 막힌 담을 허무는 자를 요청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