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총신대 평생교육원에서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죽음의 정의와 본질, 존엄사와 안락사, 조력사 그리고 자살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갖고 강의도 하고 토론도 했다. 마지막에 수강생 중 미국에서 오신 장로님이 자신이 경험한 존엄사를 들려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오랫동안 중병을 앓던 아내가 어느 날 낙상하면서 의식을 잃었고 더 이상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자녀들 모두가 호흡기를 제거하는 최종 결정을 아버지에게 미루더란다.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을 결정해야만 했던 괴로웠던 순간, 이후에 진행된 과정과 법적인 절차 등을 들려주는데, 이론이 아닌 이 실제가 모두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 100세 시대에 죽음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최근 미국에서 코린이라는 여성이 2021년에 있었던 부모의 조력사를 공개했다. 어머니가 대동맥판막협착증 진단을 받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며 수술을 거부한 뒤 낙상 사고로 상태가 악화되자 92세에 조력존엄사를 신청했다. 그러자 이미 뇌졸증 증세를 보였던 95세의 아버지는 “아내가 먼저 떠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면서 함께 신청했다. 이 부부는 스스로 선택한 날 의료진이 제공한 약을 복용하고 한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딸은 이런 부모의 죽음을 행복한 죽음이라 미화하면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공론화하려는 목적에서 뒤늦게 이것을 밝힌다고 했다.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의 양태가 유럽이나 미국 여기저기서 수용되어 가고 있고 그 영향이 우리 사회에도 밀려오고 있다. 이것을 보도한 중앙일보(2025.10.30)는 기사 마지막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성인 응답자의 82%가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 찬성했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이 여론조사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갖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유럽이나 미국을 좇아 변해가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커다란 윤리적인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20세기 이후 전통적인 가정 제도가 서서히 붕괴하고 있고 성도덕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의과학의 급속한 발달은 출생과 죽음의 영역에서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미국은 20세기 초만 해도 인구의 2/3가 50세 전에 사망했지만, 2023년의 평균수명은 78.4세에 이르고 있다(한국은 83.5세). 노인병 전문의인 랭고는 “수많은 사람이 그토록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이렇게 오래 사는 문제를 인간 사회가 이전에는 직면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런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여기까지는 허용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라고 하는 윤리적인 경계선이 끊임없이 밀리고 있다. 어제는 인간적 행동의 한계를 넘는 것으로 간주하며 경계했던 것들이 내일에는 이미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치 밤사이에 누군가 경계석을 몰래 옮겨버린 것 같은 세상이다. 윤리신학자 스튀겔베르거는 이 시대를 비판하면서 유전공학, 컴퓨터공학을 앞세우며 이런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선동적인 말들이 힘을 얻으면서 ‘균형과 목적이 없는 세계’가 되어가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E. 브룬너는 이처럼 경계석을 옮기는 시대에서는 윤리의 기반 자체가 해체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적인 기반으로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세상의 거친 행보는 위기로 느껴지고,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좁고 협착한 길로 여겨진다. 생명의 시작점에 관한 논쟁, 인공수정, 안락사 문제, 환경문제, AI의 진화로 불거질 다양한 윤리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이런 21세기의 다양한 윤리 문제에 대한 지침을 성경에서 찾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며,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야 한다. 이를 통해 균형과 목적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기 쉬운 세상이 옳은 길로 가도록 돕는 그것이 또한 세상의 빛이고 소금인 교회의 사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