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아우구스티누스와 국가 권력1
이단척결을 위해 국가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정당한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e, 354-430)는 라틴 기독교를 체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세 천년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하고 종교개혁의 정신적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신학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그는 은총의 교리를 확립하여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라는 칭호를 얻었고, 예정교리를 취급하여 오늘의 칼빈주의 신학의 원조로 지칭되기도 한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칼빈주의 신학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속에 드러나 있으므로 워필드(B. B. Warfield)는 그를 “칼빈 이전의 칼빈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그는 “역사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역사의 의미를 정신사적으로 파악하는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20세기 저명한 교부학자인 알타너(B. Altaner)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말하면서, “위대한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창조적 정열, 오리제네스의 영적 풍부함, 치푸리아누스의 교회적 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논리를 플라톤의 높은 이상주의와 사변에 결합시킨 인물이다. 그리고 라틴인의 실용적 감각을 헬라인의 영적 유연성에 일치시켰다. 그는 교부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가이며, 전 교회의 가장 주요하고도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nas, 1225-1274)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되어 왔고, 하르낙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바울과 16세기 루터 사이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광범위한 논설을 전개하였고, 그가 남기 저술은 엄청나게 많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망 직후인 431-439년에 『아우구스티누스 전기』를 쓴 포시디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1,030개의 저서명을 열거한 바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말년에 쓴 『「재고론』(Retract)에서는 427년까지 저술한 93개의 저서 목록을 열거했다. 이 저서들은 교부문헌의 최대 총서인 『민뉴전집』 32-47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500쪽의 책으로 환산해도 수십 권의 분량이 된다.
흔히 그의 작품은 자서전적 저술, 성경주석에 관한 것, 변증론적 저술, 교리논쟁적 저술, 경건문학류 등으로 구별되는데, 이 작품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아 인식에서 시작하여 존재, 진리, 사랑,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 인간의 본성, 영원성, 시간, 자유, 역사, 섭리, 정의, 행복, 평화 등 철학적인 분야는 물론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악의 문제, 하나님의 은총론과 예정론, 삼위일체론 등 다양한 신학적 주제를 취급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중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악의 문제, 하나님의 은총론과 예정론, 삼위일체론 등은 가장 많은 관심의 주제였다.
그 외에 또 한 가지 주제가 국가권력의 범위를 다룬 글이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신학자였고 역사철학자였지만 그의 주장이 다 정당하고 다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교회관과 성례관은 중세 기독교, 곧 로마가톨릭 교리 발전에 유효한 근거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는 개신교와 로마가톨릭 양자에 의해 존경과 칭송을 받아왔다. 그의 사상에서 한 가지 잘못된 주장이 국가권력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는 이단징벌에서 국가권력이나 경찰력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종교적 강제와 박해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후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단과 대결하면서 국가권력의 구속력과 강제력을 이용하고자 했는데, 이 이론을 꼼뻴레 인뜨라레(Compelle intrare)라고 말한다. ‘들어오라고 강요하라,’ 혹은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라’라는 의미인데 ‘강제권 이론’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4장 23절에 근거한 이론이었다. 즉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에 근거하여 이 논리를 폈다. 즉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가복음 주석에서 두 동사를 사용한다. 즉 'coge intrare'(들어오라고 강제하라. 아프리카 텍스트)와 ‘compelle intrare'(들어오라고 강요하라, Vulgate)를 사용하면서 억압의 이론을 발전시켰다(게리 윌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186). 이것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활동했던 5세기 당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313) 이후 황제는 교회와 신앙문제에 대한 사법권을 행사했고, 공의회를 소집하고(325) 정통과 이단 시비를 가리기도 했다. 이단자들에 대한 벌금, 재산몰수, 고문, 사형 등의 형벌을 가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핍박받았던 도나티스트들(Donatists) 조차도 이단을 반대하는 법과 강제력에 도전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법이 자기들의 집단에 적용되는 것을 반대했을 따름이다. 교회 규율문제(권징의 문제)에 있어서만 정통신앙과 다르다는 입장이었고, 그 결과로 분리주의적인 자기들의 집단이 이단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던 것이다. (다음 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