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1 Corinthians)
우리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치의 혼란과 영적 공허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정보는 차고 넘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확신은 옅어졌고, 관계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공동체의 깊이는 얕아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를 향한 질문은 피할 수 없다. 교회는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왜 존재하는가.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외형적 성장에 있지 않고, 오직 성경이 증언하는 십자가 복음에 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이라 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의 처형 도구로, 수치와 패배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 선포했다. 세상이 강함과 성공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할 때, 하나님은 약함과 낮아짐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이 역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이다.
초기 교회는 혹독한 박해를 견디며 이 복음을 지켜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가 전쟁을 앞두고 십자가의 표징을 보았다는 전승과 함께,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이 발표되면서 기독교는 공인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제도적 승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박해의 시기에도 성도들의 심령 속에는 십자가의 능력이 살아 있었다. 환경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신이 교회를 지탱했다.
325년 열린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중대한 논쟁의 장이었다. 아리우스(Ari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대립은 단순한 신학적 차이를 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참 하나님이신가라는 근본 문제를 다뤘다. 만일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십자가의 구원도 설 자리를 잃는다. 교회는 시대의 압력보다 복음의 진리를 택했고, 그 선택 위에 서 있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다. 죄는 가볍게 다뤄지지 않았고, 동시에 죄인은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모두가 죄인이며 동시에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교만을 꺾고 겸손을 세운다.
오늘 교회의 위기는 외부 환경의 변화보다 중심의 약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성장과 영향력이라는 언어에 익숙해진 사이, 낮아짐과 섬김이라는 십자가의 길은 희미해지지 않았는가. 십자가는 더 높이 오르기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더 많이 소유하기보다 더 많이 내어주라고 가르친다. 교회의 회복은 새로운 전략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십자가는 또한 은혜의 복음이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구원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 이 확신 위에 설 때 교회는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움직일 수 있다.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이후에 주어졌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고, 죽음 없는 생명은 없다. 십자가 없는 부활 신앙은 공허하다. 교회가 다시 십자가의 도 위에 굳게 설 때, 세상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변함없는 중심, 곧 십자가로 돌아가는 일이다. 교회의 능력은 규모에 있지 않고 복음에 있으며, 숫자에 있지 않고 진리 위에 있다. 십자가의 도를 붙드는 교회만이 시대를 넘어 영원을 바라보는 공동체로 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