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0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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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불편한 진실과 역사적 책무
    이 글은 2024년 10월 31일 제2회 송상석포럼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송상석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로 오래도록 금기시 되어 왔던 그 이름이 새롭게 조명 받게 되는 것을 보면서 여러가지 감회가 새로워진다. 제일문창교회 당회가 송상석 목사의 기념사업을 펼치며 그분의 업적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또 한편 편향되지 않는 시각으로 역사적 자료들을 발굴해 내고 햇빛을 보게 하는 사학자(史學者)들의 노력에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필자가 맨처음 송상석 목사와 관계하게 된 것은 악연(惡緣)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5월 그해 고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동기생인 강영식, 주종근 전도사와 함께 전국교회에 드리는 공개서한을 발송하면서 송상석 목사의 비위를 크게 건드려 버렸다. 참고로 2016년에 발행된 경남(법통)노회 100년사에는 “1976년2월19일 고려신학대학원 제30회 졸업생 중 주종근 전도사(가음정교회) 손상률 전도사(성주교회) 강영식 전도사(화삼교회)는 총회가 분열되려는 상황에서 뜻을 같이하여 여러 날 밤을 새우면서 쓴 ‘파수병의 절규’ 라는 제목의 서신을 1976년 5월 7일 전국교회 앞으로 발송했다. 같은 해 6월 25일 두 번째, 7월 15일에 세 번째, 8월 20일에 네 번째 서신을 발송했고, 제26회 총회 직전인 9월 10일에는 어떤 경우에도 교단은 나누어지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다섯 번째 서신을 발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p285) 그 첫 번째 글에서 송상석 목사와 마주치게 되고 말았다. 제1신 내용 중에 “동기와 내용이 어떠하든지 간에 피소자의 입장에 있던 송 목사께서 다시 맞고소를 하므로서 소송 반대를 들고 나온 경남노회가 안으로는 소송을 용납하는 것으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부분에서다. 이 문제로 송상석 목사는 노발대발하여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전도사들이 나이 많은 목사의 이름을 활자화 하여 전국에 뿌리다니”하며 노회에 징계를 요청하였다. 하마터면 갓난 애숭이들이 그대로 목이 잘릴 뻔 했던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노회의 중진들이 극구 만류하여 일단 경고하는 것으로 가볍게 넘어 갔다. 그해 여름 강도사 시험을 거처 이듬해 목사가 된 나에게 송 목사님이 한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다. 나는 이미 한번 찍힌 일이 있는지라 내심 걱정을 하면서 찾아갔더니 뜻밖에도 엄청난 과제를 맡기시는 것이다. 그때 송상석 목사는 “한국절제교육연구사료집”을 집필하면서 거기 포함시킬 내용 가운데 초기 한국교회가 사용한 만국통일공과중 절제공과 부분을 빼서 정리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목사님에게 왜 그런 일을 제게 맡기시느냐고 물었더니 “이 작업은 신학적 소양이 있고 문장력도 갖춘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데 손 목사를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공개서한 첫 서신에서 필화사건으로 징벌을 받을 뻔 했다가 그 일로 인하여 신학적 소양과 문장력을 인정받아서 요긴하게 쓰임을 받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나는 반고소 교단 6년 동안 총회의 임원으로 교단의 진로와 정책을 입안하는 일과 주일학교 교재를 편찬하고 출판하는 일이며 신학교 일에도 관계하는 등 열심히 봉사하였다. 안타깝게도 1982년 제32회 총회에서 소송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 합동을 결의할 때 그 현장에 있었지만 끝내 명분 없는 합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그 후로는 교단을 달리하게 되고 말았다. 1. 오해와 진실 고대 인도에서 유래 했다는 ‘장님과 코끼리’(盲人模象)의 우화가 있다. 어느 마을에 여섯명의 맹인이 코끼리를 만져 보고 제각각 다르게 평가 했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는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를 기둥처럼 생겼다고 했다. 두 번째는 꼬리를 만져보고 새끼줄처럼 생겼다고 했다. 세 번째는 코를 만지면서 나무 방망이처럼 생겼다고 했다. 네 번째는 귀를 만지면서 부채처럼 생겼다고 했다. 다섯 번째는 상아를 만지면서 단단한 창 같다고 했다. 여섯 번째는 배를 만지면서 커다란 벽처럼 생겼다고 했다. 사람의 지식은 자기가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범위만큼 한계를 지닌다는 뜻이다. 문제는 어느 한쪽만 보고 아는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다른 사람의 관점을 무시해 버리는 것에 있다. 지나간 시대의 인물을 놓고 후세 사람들이 평가 하게 될 때는 생전의 업적이나 동시대 인물들의 구전 또는 기록된 자료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나 가족이 체험한 것처럼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술 할 수는 없다. 사실 한국 교회사적 인물에 해당하는 송상석 목사의 경우 몸담았던 고신 교단 안 에서도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나누어 져 있어서 같은 팩트를 놓고도 전혀 다른 평가를 하곤 했다. 여러해 전 서울에 있는 어느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교수 한사람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한국교회 초기부터 역사 전반을 연구하던 중 여러 부분에서 송상석 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분의 이력을 살펴 보았다고 한다. 그분이 일제 치하에서 부터 각계의 유력인사들을 규합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고, 언론과 교육에 기여한 것 등 당시 크리스챤 인사 중에서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말기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고초를 겪으면서도 동지들을 도왔다는 것과 해방 후 고려신학교 설립 때 중국 봉천에 거주하던 박형룡 박사를 모셔다 교장으로 추대한 일까지 대단한 업적이 있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렇게 신학교 설립에 산파역할을 했고 교단 성장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 왜 말년에는 자신이 몸담고 키워 왔던 고신총회로 부터 징계를 받아 면직까지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교수처럼 어떤 선입견이나 이해관계가 없이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한다면 훌륭한 업적이 들어나고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인물임에도, 그와 반대로 부정적 시각에서 개인적인 실수나 약점만을 크게 부각시키며 악마화 시켜 버린다면 역사에 오명으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어쩌면 송상석 목사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퍼뜨렸거나 선동을 하여 일반에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점차 그것이 정설처럼 굳혀지게 되어 버린 경향이 많다고 본다. 1969년 내가 고신대학에 입학하던 해 학내문제로 많이 시끄러웠는데 송상석 목사를 반대하는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곤했다. 그 즈음 학생회 임원 몇사람이 이사장과 담판을 짓겠다고 마산을 찾아갔는데 그들이 직접만나 대담을 하고는 생각이 달라 졌다고 했다. 전해 진 말에 의하면 자기들은 송상석 이사장이 학교운영에 전횡을 일삼고 사욕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고 들어 왔는데 직접 만나고 보니 전혀 아니더라. 그분도 기도하는 목사님이었고 눈물도 있는 것 같더라. 생각보다 지나칠 정도로 검소해 보였으며 사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 했다. 그 당시 경남노회 안에서도 송상석 목사와 뜻을 같이하며 그분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았지만 막상 송목사가 명예훼손을 당하고 여러 가지 음해에 시달려도 거기 맞서서 팔걷어 붙이고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제24회 총회 이후 경남법통노회가 정화노회와 대립하면서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쉴새없이 회의가 열리거나 공청회를 하는 등 복잡한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여러 모임이나 회의때 마다 송상석목사 본인이 직접 나와서 사건마다 소상하게 설명을 하곤 했는데 이런 모습이 회원들의 눈에 불편해 보인다고 노회의 중진 몇사람이 찾아가서 그런일은 다른 사람들 에게 맡기고 목사님은 한걸음 뒤에 물러나 있어주면 좋겠다고 건의 한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송상석 목사의 반론은 “나에게 관한 문제인데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또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면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제 삼자처럼 본질은 덮어 둔채 적당히 타협하고 말더라” 고 했다.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송상석 목사 생전에 뿐 아니라 사후 수십년이 지나오면서 그분과 관련지어 회자된 말들중에 터무니 없이 날조된 모략과 중상도 있었고 공적 기관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있었지만 한번도 어느 누구도 대신 나서서 경위를 밝히고 책임을 지우는 일이 없었다. 모두 다 뻔히 알수 있는 일인데도 자기의 일이 아니니까 묵인하고 지나치게 되고 결국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정설처럼 굳혀 지곤 했었다. 송상석 목사를 두고 터무니 없는 허위사실을 퍼뜨리며 악의에 찬 인신공격을 하는자가 있는가 하면 이를 두둔하며 확대 재생산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유 모 목사라는 사람은 공개석상에서 송상석 목사가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를 했고 독립운동가들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괴롭힌 경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송상석 목사가 1947년 만주 봉천으로 가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올 때 국경을 통과하며 여러차례 검문을 당했으나 그가 소지하고 있었던 일본 형사의 신분증을 제시하여 위기를 넘기곤 했다고 전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소리를 하곤 했다. 차 모 교수라는 사람은 어느 특강하는 자리에서 지성인으로는 입에 담을수 없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는 송상석 목사를 가리켜 “이사람은 기회주의자, 카멜리온 같은 변신술에 뛰어난 자” 등으로 표현했다. 그는 또 “송상석이 일본형사 시절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했던 것이 알려지고 통영, 고성 지방에 소문이 나서 숨어 다녔다. 1948년 반민족 특위의 활동으로 전국에 수배를 당하게 되자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이름도 바꾸고 절에 들어가 중이 되기도 했고, 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이처럼 전혀 근거도 없고 시차도 맞지않고 사리에도 어긋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 자들이 뻐젓히 살아있고 그 동영상 자료도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다.(참조:송병일씨가 보내온 동영상 3편) 참으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까지 한때나마 송상석 목사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쓰여 졌다는 것은 씁쓸하기 이를데 없다. 2006년9월 고신 신대원 설립 60주년 기념 행사때 박형룡 박사를 만주에서 모셔다 초대교장으로 추대하게 한 공로로 고 남영환 목사 유족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한 사건도 그중에 하나다. 이것이야 말로 엄연한 사실을 날조하여 역사적 오류로 남겨진 것이다. 이 일이 만일 의도적인 목적에 의해서 였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것이고, 무지로 인한 실수 였다면 학교의 공신력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오히려 불명예를 안겨 준 것이 된다. 이부분 정확한 자료를 소개할것이 있다. 1974년9월 경남법통노회 제100회 기념식에 내빈으로 참석한 박형룡 박사는 축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 고려 신학교 설립과 운영에 있어서 출옥성도들의 주동에 그들을 존경하는 신앙동지 지도자들과 교회들의 협력이 크게 공효를 이루었다. 그 중에도 현 노회장이신 송상석목사의 비상히 희생적인 봉사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47년5월 중순 만주 영구로 가는 19톤짜리 목조 밀수선에 편승하고 황해를 모험 도항하여 봉천에서 박형룡 이 사람을 찾아 5개월만인 동년9월20일에 귀국, 동년 10월 고려신학교에 부임케 하였다. - 중략 - 당시 송상석 목사는 한국교회의 정통신학교육을 위하여 황해바다에 생명을 쏟아버릴 것을 각오하고 모험맹진 하였으니 그 교회, 신학교육을 위한 절륜(絶倫)의 충성은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뿐 아니라 전 한국교회가 영세불망(永世不忘)하여야 될 일이며 그의 모험구조를 직접 받은 이 사람에게는 백골난망(白骨難忘)이며 결초보답(結草報答) 해야 할 은덕이다 - ”(경남노회(법통)100주년 기념화보집 p5) 2. 고소(告訴)와 반고소(反告訴) 초기 고신측 사람들의 뇌리에 송상석 이름에는 소송의 대명사로, 한상동 이름에는 소송과 상관없이 살아 온 사랑이나 화평의 인물로 각인되어 있었다. 송상석 목사의 경우 장로교단 분열로 인하여 파생된 문창교회의 재산권을 두고 1950년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이 지루한 법정소송을 해 왔다. 그분과 대척점에 서 있는 한상동 목사의 경우 시무하던 초량교회를 내어 주고 절대다수의 교인들과 함께 삼일교회를 개척하였다. 전자와 후자를 놓고 단순비교를 하는 사람들은 막강한 권리를 내려놓고 맨땅에서 개척을 시도했던 한상동 목사는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로 성장시킨 신령하고 은혜로운 지도자로 추앙하는 대신 장기간 법정투쟁을 계속했던 송상석 목사를 두고는 오랜기간 소송때문에 허비한 막대한 비용으로 예배당을 짓고도 남았을것이라며 은혜는 없고 법밖에 모르는 고집 불통의 사람이라고 혹평하곤 했다. 이런일 말고도 송상석 목사의 경우 여러차례 파수군 (把守軍) 에 게재한 박윤선 교장과의 논전도 그분을 고소 옹호자로 인식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와같은 일반적 인식은 송상석 목사의 본의에 반대 되는 것으로 오해를 증폭시켜 왔다. 정리 하자면 송상석 목사는 고소론자도 반고소론자도 아니다 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분이 저술한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에는 신자간에 일어나는 송사에 대하여 성경적 원리에 입각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해 놓았고 또 해방후 한국교회의 교파분열로 인하여 본인이 직접 겪었던 사례들을 예시해 가며 전문가 적인 견해를 밝혀주고 있다. 간혹 신학자나 교회 지도자 중에 고린도전서 6장7절을 근거로 신자간 불신법정에 소송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영역인 국가기관을 인정하는 마당에 정의와 질서유지의 도구인 사회법이나 소송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견해라고 보아왔다. 송상석 목사 에게 아켈리스건으로 작용하는 문창교회 소송건의 내막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분을 소송전문가나 고소옹호론자 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문창교회 사건이 지루한 법정투쟁으로 이어졌지만 그 내막을 보면 처음부터 소송으로 가지않고 내부적으로 수습하려는 시도를 했고 송목사에 의해서 먼저 화해제안서를 제시했으나 상대측에서 거부하므로 어쩔수없이 법정 다툼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분쟁의 특수성 때문에 최종심에서도 해결될수 없었던 문제가 결국은 송상석 목사의 제안대로 쌍방이 합의하여 타결된 결과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소송문제와 관련하여 한상동 목사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상동 목사 에게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출옥성도의 명망이 있는데다 초량교회의 건물과 재산을 그대로 두고 빈손으로 나와서 개척을 시작하여 대형교회로 성장시켰기에 사랑과 은혜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어 있었다. 그분은 교계와 신학교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법과 원칙에 근거하는 공적인 체계보다 신앙과 은혜, 또는 사랑과 평화를 표방한 나머지 공동체를 지탱하는 규범이나 질서를 흔들리게 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고신역사에 굵직한 사건이나 중요한 사안을 두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 또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섰던 경우 이를 용납하거나 공존하지 못하고 결국 결별하게 했던 사례가 많이있다. 타교단 인사들이나 고신 교단에 몸담았다가 중간에 떠나간 사람들 중에도 한상동 목사를 아는 사람들 입에서 그분의 독선적 리더십을 비판하기도 하고 또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고 떠나가게 하는 편협한 인물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 송상석 목사와의 관계야 말로 고신의 성장과 발전에 공헌하여 다 같이 후세 사람들로 부터 오래도록 존경받아야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 까지 영광의 동지자로 남아야 될 사이임에도 말년에 사회법정 소송이라는 최악의 방법을 동원하면서 목사면직 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하고말았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때 누구는 소송 옹호론자 이고 누구는 소송 반대론자라는 도식은 성립이 될 수 없고 또 지금와서 그런 문제의 시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본다. 세월이 지나고 인물도 떠나가고 상황도 많이 바뀌어 버린 지금 되돌아보면 한 시대를 휩쓸고 간 소용돌이와 격랑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 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3. 반성도 없고 책임자도 없는 어두운역사 고신측 총회에서는 1970년대(1972-1976) 신학교와 교단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급기야 교단분열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진통과 파란을 겪게 되었는데 이런 일로 인하여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표방하던 교단의 위상과 정체성에 엄청난 손상을 가져왔다. 1976년 고신교단이 제26회 총회를 기점으로 소위 고소측과 반고소측으로 분열되었다. 반고소측은 1년뒤 비슷한 명분으로 또 다시 분열하여 고려측(석원태 계) 총회가 따로 조직 되었는데 이후 제각기 신학교를 운영하며 목회자를 배출하는 등 교단의 행세를 해왔다. 반고소측 총회나 거기서 나누어진 고려측 총회도 똑같이 본래 고신총회의 회수를 그대로 사용했고 신학교도 졸업회수를 그대로 이어갔는데 양쪽 다 “고소측 총회가 제24회 총회결의의 공죄를 회개하고 번복할때는 언제라도 하나가 될수있다“는 합동조건을 내걸고 있었다. 결국 1982년 32회 총회때 반고소측 총회는 고소측과 합동을 하게되었는데 6년전 나누어질 때 목숨을 걸다시피 했던 본질문제 에는 유야무야로 넘어갔다. 1982년 제32회 총회에서 채택한 합동위원회 보고서 제2항에는 ”우리가 소송문제를 가지고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 앞에 피차 죄송스러운 것이므로 하나 되기를 원하여 무조건 하나 되어 지기를 가결해 주실 것을 원합니다“ 라고 되어있다(경남법통노회100년사 P312) 반고소측 총회가 고소측총회와 합동이 된후에 남아 있던 반고소 고려측 에서는 저희들만이 성경진리를 파수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유일한 총회라고 주장해 나왔다.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시차를 두고 점차 고신 본류로의 합동에 가세하면서 사실상 고신에서는 고소와 반고소의 의미는 사라저 갔고 이 문제는 한 시대 또는 인맥중심의 해프닝처럼 되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고신 역사에 반고소 운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신법정 소송문제가 교단의 분열을 가저 올 만큼 큰 이슈가 되고 신학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진리논쟁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 시기 영향력있는 목회자들과 신학교 교수들까지 가세하여 신학과 신앙의 본질적인 대결로 몰아 갔지만 그 실상은 신학교 이사회의 내분과 교권싸움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이 들어났다. 총회 제23회와 24회는 ‘신자간 불신법정 소송문제’ 에 대한 총회결의가 대세에 따라 엎치락 뒤치락 했는가 하면 같은 조항을 놓고도 편리한대로 적용하는 등 일관성 없었던 총회의 입장이 이면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와같은 전후사정을 살펴볼 때 교단 행정을 책임진 실세들이 자기들의 권력문제나 이해관계에 따라 무고한 교회와 순진한 성도들을 희생시켜 왔다는 점이다. 참으로 ‘고래싸움에 새우가 등터진다’는 말은 여기에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이없다. 모두가 하나님 앞과 역사 앞에서 뼈저리게 회개하고 책임을 저야 할 일이 아닐수없다. 고신에서 나고 고신에서 자라 목사가 된 나는 소송문제로 야기된 교단의 분열과 합동의 격동기를 겪으며 누구보다 큰 기대와 상처를 다 지니고 있다. 그당시 경남 법통노회를 중심으로 총회와 행정을 단절하고 반고소 총회를 출범하려고 할때 다수의 사람들이 꼭 이렇게 까지 해야 되느냐며 간곡히 말려도 보았지만 지도층 사람들은 “형제끼리 갈라서는 것은 수족을 잘라내는 것 같은 아픔이나 이 길만이 진리를 파수하는 수단이기에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감행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때 나는 그것이 옳은 길인줄 알았고 그 쟁쟁한 선배들의 관록과 정신에 매료되어 더욱 진취적이고 야심차게 지경을 넓혀 나가리라 생각하고 죽기살기로 매진하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가 지나자 어느때 부터인가 겉으로는 쉬쉬하면서 속으로는 그토록 증오하던 고소측 사람들과 합동을 모색하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는 소송이 비성경적 이라거나 특별재판국의 부당한 권징과 교권의 횡포에 대한 책임문제 같은 것은 논외로 하고 무조건 하나되는 것 만이 살길이라는 식으로 굳혀져 가는 것 같았다. 1980년 11월 송상석 목사가 세상을 떠나기 임박했을 무렵이다. 어느편으로 송목사님께서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다녀 갔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즉시 마포에 있는 따님 댁으로 갔더니 목사님은 기력이 쇠약하여 숨쉬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나의 손을 꼭 잡고 의미있는 당부를 하셨다. 그것은 두가지 내용이었다. 첫째는 제일문창교회 원로목사 집무실에 소장되어있는 자료들을 손목사가 맡아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정리해 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또한가지는 본론격인 고소측과의 합동문제였다. 자기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인데 같은 형제끼리 싸우다 찢어진 상태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나누어진 형제가 하나 되도록 젊은 목사들의 마음을 모아서 동참해 달라는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연로하신 목사님의 이 마지막 당부를 거절하고 말았다. 나는 “그 당시 목사님께서 오직 성경진리를 파수하기 위한 일념으로 골육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일이라고 역설하셨지 않습니까”하고 거부의사를 분명히 해 버렸다. 적어도 진리투쟁을 표방했던 반고소 운동이 아무 명분도 없는 합동을 한다는 것이 소신있는 목사들의 행동일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때 목사님은 마지막 명언 곧 “진리를 붙잡는다고 화평을 포기했는데 지금와서 보니 진리도 놓치고 화평도 버린 결과가 되고말았다” 는 말을 남기셨다. 송상석 목사가 떠나 간지 2년후 1982년 9월 마산교회당에서 개최된 제32회 총회에서 고소측 총회와 합동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때 나는 역사적인 합동결의 안을 의결할 때 총회 서기로 집무를 하고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합동결의가 대세였으나 교단분열 이후에 목사가 되었거나 외부에서 가입해온 목사들을 중심으로 젊은층 일부까지 반발하는 세력들도 있어서 긴장이 감돌았다. 사회하던 총회장이 가부를 물어 만장일치가 되었는데도 반대하는 세력의 눈치를 보며 가결 선언을 늦추기도했다. 물론 서기석에 있던 나도 아무런 의사표현을 하지않았다. 침묵은 묵시적 찬성에 해당한다. 회장의 가결이 선언되고 회중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저 나오기도 했다. 그럴때 나는 손을들고 발언권을 얻어 발언대에 섰다. 그때까지 내가 앞장서서 반대발언을 해 주기를 기대하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와서 왠 뒷북이냐’는 식의 비웃는 눈으로 처다 보는 것 같았다. “....6년전 진리파수를 표방하고 반고소 고려측 총회가 출범했으나 지금와서 조건없이 합동한다고 하니 착잡한 마음 금할수 없습니다. 다만 나누어진 형제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모두가 찬성하는 일에 차마 반대할수 없었습니다. 한가지 제안을 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동안 이 일로 인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순진한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혔던일은 마땅히 책임을 저야 할것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그당시 목사와 장로들 모두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숙할 것을 결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는 잠시 숙연한 듯 말이 없었으나 누구도 찬성하는 사람없어서 소리없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말없는 다수 가운데 겉으로 박수를 쳤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허탈하였고 그동안 우리는 헛개비를 보고 쫓아 다녔던가 싶은 비통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사의 언행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배들은 1960년 승동측과 합동했다가 3년뒤 전격적인 환원을 하고 그해 9월 남교회에서 모인 제13회 총회에서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목사와 장로들이 자숙을 결의한바가 있었다. 성경전체 중에 고린도전서6장만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목숨걸고 지키겠다고 전면에 나섰던 사람들이라면 어떤 형태라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야 마땅했다. 4. 누가 분리주의자 인가 일반적으로 “고려파 분열의 중심에 송상석 목사가 있다”는 말을 하곤한다. 이 통념에 동의할 수가 없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도 하는데 그 말에도 동의 할수없다. 고신24회 총회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고 경남법통노회의 다수를 권징한 것은 송상석 목사 문제가 핵심이었다는 것은 부인할수 없다. 그러나 26회 총회 부터 고소측과 정상화를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꾸준히 합동교섭을 해 왔는데 거기에도 항상 송상석 목사가 걸림돌로 작용하여 그분 생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파다해 있었다. 그렇다면 정작 당사자인 송상석목사의 입장도 그랬을까? 이 부분 일반에 알려지지않은 사실이 있다. 송상석 목사 본인 입장에서는 고려신학교 설립과 발전에 이바지 한 일이나 이후에 일어난 어려운 고비마다 궂은일을 마다않고 수습하며 그야말로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헌신 하여 발전시킨 교단이다. 일반적으로 송상석 목사를 고신의 세기둥(항상동,송상석,박윤선)중의 한축 이라고 말하지만 알고보면 법과 행정적 기반을 제도화 하고 장기적인 비젼을 제시하여 선진교단으로 발전하게 하는데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말년에 후배들로 부터 목사의 생명을 거두어 버리는 극단적 징벌을 받았으니 그 울분이야 오죽했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와같은 인식은 고려신학교와 총회의 설립부터 성장하는 과정에 그분이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살펴보면 자명한 대답이 나온다. 우선 신학교와 관련된 일만 보아도 그렇다. 고신을 설립할 때 적어도 평양신학교의 정통성을 계승해야 된다는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초대교장으로 박형룡박사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본인이 직접 5개월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황해를 도항하는 모험을 감행하여 만주 봉천에 있던 박형룡 박사를 모셔다 교장에 앉힌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1960년 박윤선 교장이 신학교를 떠났을때와 그 후에도 여러차례 학교에 갈등과 알력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며 수습하여 공적 위상을 세우고 발전의 기틀을 이루어놓았다. 1960 승동측과의 합동을 하고 곧이어 한상동 목사 주도로 단행된 고신복교와 총회 환원으로 엄청난 혼란이 거듭 되었지만 그 많은 어려움을 무릎쓰고 뒤치닥 거리를 하며 총회의 안정을 도모해 왔던 것은 그분의 탁원한 지도력과 행정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점은 부인할수가없다. 타교단 사람들의 눈에 비췬 평가중에 한상동 목사는 출옥성도의 명성과 혁명가적인 지도력을 행사하여 교단에 상징적 인물로 알려저 있지만 다른 한편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과는 공존하지 못하고 떠나 가게 만들었다는 평을 듣는다. 송상석 목사 역시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도 센 편이지만 사람을 내치거나 분열을 조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목사가 되기전부터 YMCA를 중심으로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청소년 금주금연을 위한 법제정까지 얻어 내기도했다. 또 국내외 구분없이 문서운동과 언론활동에도 종횡무진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사회 각계층의 인물들과 폭넓은 교우관계와 인맥을 넓혔던것은 그분의 포용력과 대범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5. 제24회 총회 특별재판국 결의는 무효되어야 나는 3년전 이상규 교수의 <송상석과 그의 시대> 출간에 간여하게 되었다. 참으로 어렵사리 원고를 수집하여 교정을하고 여러번 힘든 과정을 거처 출판작업에 들어갈 무렵인데 미국에 있는 송상석 목사의 4남 송병일씨가 강력하게 반발하는 글을 보내왔다. 그는 처음 이교수가 자기 아버지에 관한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 고맙게 생각하면서 큰 기대를 가졌었다고 했다. 그런데 편집된 내용을 보니 집필진 가운데 송상석 목사 에게 등을 돌렸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제58회 고신총회가 경남노회의 헌의를 받아 송상석 목사를 사면하기로 결의 한것에도 강한 불만과 분노를 표출했다. 총회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여 사문서 위조, 공금횡령, 총회불복종 등의 죄목으로 목사면직까지 단행 해 놓고 수십년이 지난 후 파렴치범 이나 다름없는 죄목을 그대로 둔채 마치 은전이나 베풀 듯이 용서한다는 뜻의 사면을 결정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다. 평생을 목사로 살아온 원로에게 씻을수 없는 죄목을 공표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목사 면직까지 시켜놓은 자들이 고작 ‘사면’이라는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을 상쇄할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그당시 총회에서 송상석 목사의 사면과 복권문제가 거론될 때 많은 논란이 있은 것으로 안다. 정당한 권징이었다면 반드시 당사자의 회개와 공적 고백이 따라야 된다는 논란도 있을법하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된 그분의 경우 사과나 고백은 당연히 있을수 없지만 생전에도 본인이 그 재판의 절차나 과정이 불법이었고 결과 또한 승복할수 없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한때 고려파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까지 흔들어 놓았던 “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가 총회 전체의 뜨거운 감자였지만 결국 송상석 한사람 정죄하여 면직시키는것으로 논란의 종지부를 짓고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으니 더는 할말이 없게되었다. 고신총회 안에서 송상석 목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나 그 이후의 사람들 누구도 그분을 향해서 정죄 하거나 용서할 정도의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이 교단에 끼친 공로나 업적은 차치하고라도 정말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권징을 당하고 면직을 받을만큼 해악을 끼쳤다고 생각할수있을까. 오히려 그와 대척점에 섰던 한상동 목사나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벌어졌던 중요한 사건들 중에는 교회법으로나 사회법으로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사실이 들어나곤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1967년에 있었던 사조이사단 사건의 경우 신앙적으로나 사법적으로 용납될수없은 엄청난 범죄였지만 송상석 목사는 불법을 조장하고 가담한자를 사법에 고발하거나 확대 시키지 않고 사과를 받는 것으로 수습하고 끝낸일이 있다. 누구보다도 법률지식과 사리에 밝은 송상석 목사측에서 그때마다 사직당국에 고발하고 권징으로 다스렸다면 총회가 편안하게 오늘까지 존속될수 있었을까.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듯 변죽만 울릴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본론을 짚고 나가야 될 것이다. 제23회 총회에서 불신법정 소송 문제에 대한 교단의 입장을 천명해 놓고 이듬해 다시 번복하여 특별재판국 설치와 송상석 면직까지 거사를 강행 했던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제24회 총회의 결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쳐놓으면 다른 것은 저절로 원인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만큼은 언제든지 고신 총회가 한번은 풀고 가야 될 숙제라고 생각한다. 이 일은 필자를 비롯하여 그 시대를 살았고, 그 살벌한 대립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 분열의 소용돌이 휘말렸다가 아픈 상처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다같이 통감할수 있는 정확한 해법임이 분명하다. 한국교회는 지난날 공회가 잘못된 결의를 하여 역사적 과오를 남긴일이 있었지만 사후에 잘못을 시인하고 바로 잡게한 전통이 있다. 1946년 6월 12일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32회 총회는 19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승인한 결의에 대하여 이를 총회가 저지른 범죄로 시인하고 취소결의를 한 사례가 있었다. 3년전 인천 초원교회에서 거행된 <송상석과 그의시대> 출판기념 예배에서 축사를 한 고신대신대원 신원하 원장은 송상석 목사와 관련된 사건을 두고 “우리 고신총회 역사에 대한 불편한 진실” 이라고 말 했다. 사실이 그렇다. 개혁주의 신앙은 언제든지 회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강조한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잘못된 것을 덮어놓고 뻔히 알면서 모른척 한다고 미화될수 는 없다.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 불편한 진실은 어떤 경우에도 밝혀 져야 되고 언제든지 제자리에 돌려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1979년 여름 어느날 나는 마산 상남동 송상석 목사 자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분의 역작 <한국절제교육 연구사료집>을 출간하고 친필 서명을 한 책을 전달하고자 부르셨던 것이다. 그날 긴 시간에 걸처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한상동 목사에 대한 그분의 감정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누구는 꽃상여 차를 타고 수많은 인파의 환송을 받으면서 영광스럽게 떠나갔지만 나는 이 책 한권을 손에 들고 하나님앞에 서려고 한다” 고 하시는데 그 얼굴에 여러 가지 회한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때가 한상동 목사 돌아가신지 3년반이나 되었지만 세상 떠난분을 들먹이면서 아직도 삭이지 못하고있는 감정이 묻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1976년1월 한상동 목사가 돌아가시자 고신대학교 강당에서 총회장으로 성대하게 장례식을 거행 하였는데 그날 송도에서 서면을 거처 동래로 이어지는 장례행열에 엄청난 인파와 차량이 동원되어 부산이 생긴이래로 가장 큰 장례식이었다는 말이 나왔다. 오랜기간 송상석 연구에 몰두해 온 강종환 장로는 “송상석 목사의 재평가를 위한 제언”에서 “비록 송상석 목사에 대한 1974. 12. 6. 고신총회 특별재판국의 ‘목사면직’이라는 결과에 대하여 제58회 총회에서 ‘사면’을 결의하였지만 사면하였다고 역사적 사실이 바로 잡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제1회 송상석기념포럼 p89)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근래에 들어 송상석목사에 관한 출판물이 나오고 그분에 대한 기념 사업들을 벌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기대할 일임에 틀림이없다. 그러나 당사자인 송상석 목사나 그분의 유족들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고인의 숨겨진 업적을 들어내고 그 이름을 높이 칭송해 준다고 한들 형사범으로 정죄하여 목사직을 거둔채로 세상을 떠나게 한 그 상처와 응어리는 삭여지거나 없어지지 않을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지난날 고신 총회가 송상석 목사를 면직 처리한 일은 하루빨리 고쳐 놓아야 할 과제라고 본다. 그렇게 하는 것 만이 고인에 대한 올바른 도리이며 한맺힌 가족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차제에 송상석 목사 기념사업회가 벌이고 있는 사업들 중에 일차적인 목표를 송상석목사를 면직시킨 제24회 총회 결의를 번복하게 하는 것으로 그 방향을 잡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결국 결자해지(結者解之)차원에서 총회가 풀어야만 되는 과제인 것이 확실하다. 송상석 목사가 세상을 떠나신지 44년, 총회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여 면직을 시킨지 50년이 되었다. 반세기가 지나는동안 세대로 바뀌었고 주변의 상황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지만 아직도 남아았는 이 상처와 앙금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풀고 가야될 역사적 책무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표방해온 고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회복하는것이며 또한 오고오는 후학들에게 자랑스러운 코람데오의 정신을 이어가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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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 KUPM 40주년, 제40회 선교대회
    KUPM 40주년, 헌신의 발자취를 넘어 새로운 미래를 향한 비전을 세우다. 전국대학교수선교연합회(KUPM, 이하 KUPM)는 CCC교수회와 함께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서울대학교 평창캠퍼스에서 제40회 연합 선교대회를 개최하여, 지난 40년간 하나님의 주권 아래 걸어온 헌신의 여정을 돌아보고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향한 거룩한 이정표를 세웁니다. KUPM 40년사 편찬위원장 이선복 교수의 사회로 진행되는 회고와 전망 분과는 눈물로 씨앗을 뿌리던 태동기부터 팬데믹의 고난을 넘어 제2의 도약을 일구기까지의 6단계 역사를 되짚어보는 감사의 장입니다. 이 시간은 전국 12개 지회와 7개 위원회의 사역 현황을 점검하며 KUPM의 저력을 확인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캠퍼스를 섬겨온 선배 교수들의 수고에 존경을 표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의 발자취를 깊이 성찰하는 것은, 변화하는 대학 환경 속에서 차세대 리더십 양성, 글로벌 선교 확대, 그리고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미래 과제를 향한 지혜와 동력을 얻기 위함입니다. 미래를 향한 청사진: AI 시대, 디지털 복음 생태계를 구축하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 위에서 KUPM은 미래를 향한 담대하고, 획기적인 청사진을 과감하게 펼쳐 보입니다. 바로 AI 시대 학원복음화를 위한 디지털 생태계 조성을 위한구체적인 대안, '학생-교수-CEO 멘토링 플랫폼' 개발입니다. 남승호 교수(서울대)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 세션에서는 먼저 ‘AI시대 학원복음화를 위한 기독교수와 CEO의 역할과 소명’을 주제로 강용현 교수(CCC 대외협력위원장)의 주제 특강이 진행됩니다. 이어서 한석영 교수(인제대)가 학생/교수/CEO 1:1 멘토링 시스템 구축을 위한 플랫폼 개발 방안을 발표하고, 황홍섭 교수(KUPM), 문용재 교수(CCC), 정승영 위원장(CBMC)은 플랫폼 개발에 따르는 세부적 요소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의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세대의 학업과 진로, 신앙을 통합적으로 섬기기 위한 KUPM의 미래지향적 고민과 준비가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증명합니다. 사명, 학문이 기도가 될 때: 전문성으로 빚어내는 사역의 실제 물론, 이처럼 거대한 미래 비전이 구호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사역을 감당하는 교수들의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선교대회의 핵심 정체성은 ‘기독교수이기에 가능한 고유한 사역’에서 가장 선명하게 빛을 발합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손녀, 손자, 다음 세대를 향한 뜨거운 마음은 시니어 교수의 역할 조명(이상식, 계명대)과 대학원생 선교 전략(남승호, 서울대)으로 구체화되며, ODA 국제협력(장요한, 계명대), 영어 리더십를 통한 프리이벤절리즘(김영우, 한국교통대), 글로벌 교육선교(박창일, 계명대) 등 각자의 전문성은 세계를 품는 선교의 도구가 됩니다. 또한 유학생을 위한 한글학교(정동영, 한국외대), 문화예술을 통한 세계관 표현(황승림, 조선대) 등 마음의 문을 여는 따뜻한 접근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복음 전도(금상호, 충북대), 캠퍼스 교회 개척(임경철, LDI) 등 실전적 모델들은 '학문이 기도가 되고 캠퍼스가 선교지가 되는' 살아있는 간증들입니다. 감격의 절정: 이론이 사명이 되고, 다짐이 헌신이 되는 '교수선교사 파송식' 이 모든 과거에 대한 감사와 미래를 향한 비전, 그리고 현재의 다채로운 헌신은 마침내 하나의 거룩한 예식, '교수선교사 파송식'에서 감격의 절정을 이룹니다. 한재호 교수(고려대)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 파송식은 "모든 교수를 선교사로 세우라"는 대회의 심장이자, 선교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임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이론이 사명이 된 교수들이 오정수 교수(충남대)의 메시지와 이지형 교수(고려대), 김성현 교수(건국대)의 간증을 통해 교수선교사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합니다. 이 파송식은 40년 헌신이 맺은 가장 아름다운 열매이자, 각자의 캠퍼스와 세상 속으로 보냄 받는 복음의 사절단이 새로운 40년의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을 선포하는 가장 빛나는 약속의 시간입니다. 다채로운 시간들: 다음 세대를 깨우는 영성과 지성의 만남 그 외에도 다채로운 행사과 분과들이 있습니다. 대회 첫째 날 저녁의 대미는 휘닉스파크 야외대공연장에서 열리는 CCC 대학생수련회 저녁집회가 장식합니다. 이 집회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수많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뜨거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예정입니다. 대회 둘째 날에는 다음 세대가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다채로운 특강이 이어집니다. 김지연 약사(한국가족보건협회)가 '건전한 대학생활'을 주제로 마약퇴치 및 자살방지 캠페인에 대한 실제적인 강의를 진행하며, 이어서 박명룡 목사(청주 서문성결교회)는 '다음 세대를 살리는 기독교 변증'을 주제로 심도 있는 영적 무장을 돕습니다. 그외에도 미래 선교를 위한 중요한 연합의 장도 마련됩니다. KUPM이 CCC, CBMC, 한국가족보건협회와 각각 연합을 공고히 하는 MOU 체결식을 통해 다음 세대 사역을 위한 협력 체계를 더욱 굳건히 다질 계획입니다. KUPM 선교위원장 황홍섭(부산교대)는 KUPM과 CCC의 40주년 연합대회를 'KUPM 40년 지성과 영성 사역에 CCC 동력이 결합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했습니다. 특히 이번 연합은 교수-학생-기업을 연결하는 플랫폼을 통해 다음 세대의 진로, 신앙, 학업, 취업을 통합 지원하는 지속가능한 복음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합니다. 단순한 40주년 기념을 넘어 미래 캠퍼스 선교의 실질적 동력을 확보하는 위대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문의: 박신현 교수(고신대, KUPM 증경회장) 010 3882 0759, shinhyunpa@naver.com
    • 기고/강연
    • 기고
    2025-06-17
  • (기고)합창하는 목사의 즐거움
    ‘고신목사합창단’이 창단 된지 8개월 정도. 목사가 합창을 한다. 그냥 참 좋다. 목사님들 만큼 ‘찬양합시다. 아름답게 찬송합시다’라고 외치는 사람도 없을 뿐 더러 목사님들 만큼 ‘준비하지 않은 찬양, 아름다운 선율을 연습하지 않고 찬양하는 사람’도 없을 거다. 목사님은 주로 받은 영감대로 감정대로 찬송을 인도하면서 찬송한다. 그래서 목사님은 찬양대원을 부러워한다. 거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청소년 시절부터 찬양대원으로, 전도사 시절에는 지휘자로 봉사하였다. 그만큼 음악적 재능이 있고 개발된 분들이다. 그런데 합창할 기회가 없어서 하지 못 했을 뿐이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연주했고 교회 중고등부 찬양대원, 학교 합창부였다. 음악을 즐기는 음악 애호가이지만 목사 안수 이후에는 합창을 할 기회도 찬양대에 설 기회는 없어서 부러워했다. 고신교단 목사님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창단되어 70을 눈앞에 두고서야 합창을 연습하면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있다. 그냥 참 좋다. 합창을 하다 보니 몇가지 큰 즐거움을 누린다. 첫째는 집중하고 긴장하는 순간의 쾌감을 갖는다. 합창은 지휘자의 손짓, 눈빛, 몸짓, 표정에 집중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지지 않으려는 긴장이 있다. 예배 인도 이전의 긴장이나 설교단에 오르는 긴장과는 결이 다르다. 긴장이 주는 희열이 있다. 반주 음을 집중해서 듣는다. 기준을 잃지 않으려는 반주음 듣기는 음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집중이다. 옆 사람의 소리를 집중하여 듣는다. 가끔은 저 멀리 있는 동료 단원의 소리도 듣는다. 그렇지 않으면 튀어 나와서 합창을 그르치게 된다. 다음은 음악을 만들어 가는 즐거움이 있다. 음악 애호가로서 그냥 감상할 때는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수월하게 들었지만, 연주자가 되어 음악을 만들면서 표현하려니 쉽지 않다. 미켈란젤로가 말한대로 ‘사소한 것들이 완벽함을 만든다’ 또는 ‘God is in the details.’라는 독일의 건축가 Ludwig Mies van der Rohe의 말처럼 사소한 것, 디테일이 중요한데 잘 되지 않는다. 음표의 점 하나 꼬리 하나 놓치지 않아야 하고 반음도 살리려고 연습을 한다. 지휘자를 따라 연습에 연습을 하고 고치고 익히는 훈련과정을 지나면 어느덧 음의 고저 장단 강약이 어우러진 음악이 된다. 즐겁다. 또 다른 즐거움은 교제다. 나이 60을 지나면서 작심한 것 중 하나가 새로운 사람과 엮이지 않고 맺어진 인간관계를 잘 맺어 가자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고 음악을 아름답게 만드는 과정을 지나면서 노래하는 동료 목사님에게 친근감, 심지어 동지애가 생긴다. 찬양으로 엮어지는 형제구나. 형제가 동거함이 아름답구나!
    • 기고/강연
    • 기고
    2025-06-17
  • (제언)고령화시대의 설교자들에게 제안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지공거사(지하철 무임승차 경로우대 어르신)가 듣는 안내 방송은, “슈크림 도어가 열립니다. 발 빠진 쥐 발 빠진 쥐. 전통차와 생강차 사이가 넓으니 맥이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듣는 정확한 내용은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내리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고령화 사회에서 웃고픈 현실이다. 난청 어르신들은 불편하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지만, 노인성 난청도 그 중 하나다. 교회에서는 노인성 난청 성도가 설교를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어 예배에 소극적으로 참예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의사 신문에 따르면 인구 20% 이상이 노인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난청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신체는 20대에 성장이 멈추고 30대부터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는데 40대가 되면 시력이 떨어지면서 노안을 위해 돋보기 안경을 쓰기 시작한다. 귀도 마찬가지로 노화에 따라 청취 기능이 점점 떨어져 70대에 이르면 3명 중 1명이 난청을 겪게 된다고 한다. 노인성 난청 인구가 늘어 남에도 교회는 난청 어르신들을 위한 배려가 거의 없는 현실이다. 아니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교회 설교자가 연로하신 어르신들에게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로하신 분들은 난청으로 설교를 잘 알아 듣지 못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면서 끄덕 끄덕 거리시고 찬양도 할 수 있는 척 지혜롭게 처신하신다. 60세 이상 어르신들의 난청이 생각보다는 심각하기 때문에 예배 중 설교를 어느 정도 알아 듣는지, 대표 기도에 어느 정도의 진심을 담아 아멘으로 화답하는지, 그냥 체면상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닌지 꼼꼼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노인성 난청 어르신들이 늘어 나는 고령화 교회를 위해서 몇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1. 시청각 교재(PPT)를 활용하자. 교회마다 빔프로젝터에서부터 고화질의 대형 LED까지 잘 구비되어 있다. 아쉬운 것은 그 좋은 영상 시설로 강단 위 주인공의 얼굴, 소지하면 필요 없을 수도 있는 찬송가 가사, 성경 본문 정도만 보여 준다. 영상 시설을 설교할 때 시청각 교재로 사용한다면 좋겠다. 50-60년 전 주일학교에서는 괘도(걸그림) 융판, 환등기 등을 이용한 시청각 교육으로 주일학교는 재미가 있었다. 교육의 효과적인 측면에서도 듣기만 한 것은 10%, 본 것은 50%, 체험한 것은 80%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설교자 대부분은 말로 설교하고 청중은 듣기만 하는 실정이니 교육 효과가 아주 낮다. 교회의 영상 시설로 PPT(PowerPoint)를 많이 사용하자. PPT를 세련되게 제작하면 좋겠지만, 어설프고 간단하게라도 요약된 내용을 청중이 읽으면서 설교의 흐름을 따라 을 수 있을 정도라도 PPT를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 요즘 텔레비전을 시청해 보면 대부분의 방송들은 음을 소거해도 그 흐름을 충분히 따라 갈 수 있을 정도로 자막을 많이 사용한다. 굳이 화면에 설교자 얼굴을 내어야 한다면 자막 문화가 대세이니 설교 내용을 자막으로 보내어도 좋겠다. PPT를 제작하여 사용해 보면 설교자에게도 유익이 크다. 큰 제목 작은 제목을 정하고 주제 또는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PPT를 만들게 되면 설교하기에도 좋다. 설교를 완전 파악하니 청중과 눈을 맞출 수도 있다. 거기에 지도 그림 등을 찾아 사용하면 더 분명하고 쉽게 성경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2. 난청 어르신들을 위한 또 다른 대안으로 헤드폰(이어폰)을 비치하자. 드물기는 하지만 외국인을 위하여 통역을 하면서 헤드폰(이어폰)을 비치하는 교회가 더러 있다. 난청의 어르신들은 외국어로 설교를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듣지 못하니 헤드폰(이어폰)을 제공하여 또렷하게 설교를 듣고 예배에 편리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3. 더 나아가 목회적 차원에서 보청기 착용을 권하고 지원하자. 노인 인구 중 보청기가 필요한 중등도 난청 유병율이 20-25%라고 한다. 교회 로비에 돋보기가 비치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본다. 노안이 오면 돋보기를 사용하듯이 난청이 오면 보청기를 착용하여 설교 말씀을 더 또렷한 소리로 들으면 좋지 않겠는가. 문제는 보청기는 고가이다. 교회가 목회적 차원에서 소액이라도 지원하면서 보청기 착용을 권하면 좋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노화된 귀는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천하보다 더 귀한 어르신들이 난청이지만 말씀을 더 잘 듣고 예배에 더 능동적으로 참예할 수 있게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교회가 많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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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7
  • (기고)“중보기도의 능력 체험담 과소평가 해온 원로장로”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나왔다. 가족들과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부르짖는 중보기도 덕분이었다고 간증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말 못하고 반신불수 상태에 빠진 체로 누워있었다. 2024년 4월 2일 오전 8시30분경 이었다고 전해졌다. 의사들의 파업으로 병원은 적막했으나 당번이 마침 신경과 의사였기에 완벽한 처치를 마치고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중환자실의 첫날밤 의식은 있으나 말을 못하고 손발이 경직되어 불구자에 가까웠다. 밤은 깊어 갔다. 자정 무렵 비몽사몽간에 낮 익은 통성기도 소리가 우렁차게 고막을 울렸다. 그리고 여러 갈래의 기도들이 아름다운 색줄기를 이루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사푼사푼 내려오고 있었다. 이런 기도소리 중에는 아버지의 97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해외에서 온 딸들의 부르짖음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장로님, 김 장로님을 지켜달라는 성도들과 동료 장로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신기하게 들려왔다. 심지어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와 일가친척, 심지어 내가 섬긴 한상동 목사, 한경직 목사, 강원용 목사, 정진경 목사, 강병훈 목사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김준곤 목사와 조용기 목사는 웃으시면서 돌아갔다가 그때, 그 시간에 오라고 타일렀다. 나는 이 소리들이 바로 나의 급변 소식을 듣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중보기도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새벽 5시경이었다. 간호사가 와서 말했다. "어르신, 아까 찬송 부르셨지요? 할렐루야 아멘도 몇 번 하셨어요" 나는 다음 순간 말문이 열렸다. “아~아 그래요?” 그리고 손발도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그날아침 그러니까 생일날인 4월 3일 아침 나는 새로 태어남을 느꼈다. 이날따라 병원식은 미역국 밥이었다. 그 후 3일을 중환자실에 있다가 주치의 처방에 따라 하루를 일반병실에 머문 후 입원 닷 새만에 퇴원 귀가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범사에 함께 하심을 믿는다. 그날아침 7시 18분쯤 미국에서 온 둘째 딸 원숙이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진 아버지에게 오찬 약속 확인 차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았으나 말을 못하고 중얼대니 사고가 크게 난 줄 알고 종로에서 마포집까지 달려왔다. 뒤이어 도착한 사무국장 이희연은 무조건 지체없이 119를 불렀다. 골든 타임이 남아 있었다. 의사들이 파업 중인데 그날아침 응급실 당번이 신경과 의사여서 일사천리 치료가 가능했다. 중환자실도 많이 비어 있었다. 그 무엇보다 릴레이식 중보기도의 응답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퇴윈 후 천국에 갖고 가지 못 할 세속적인 물질이나 가치관들을 가차없이 정리하고, 상대화 하는 길을 향해 걷기로 했다. 그리고 중보기도를 멀리한 독선적 신앙을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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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4
  • [기고] 백해무익한 재판국원의 자격 시비
    기독신문 제2417호(2023.12.19일자)에 “재판국 서기 박종일 목사 ‘자격 논란’ 불거졌다.”라는 신문 기사가 보도되었다. 필자는 사건의 내막을 알지 못하므로 신문기사의 내용을 토대로 재판국원의 자격 여부에 관련해서만 글을 쓰고자 한다. 1. 잘못된 헌법 적용  재판국원의 자격을 제기한 이재천 목사는 “박종일 목사는 권징 조례 제19조 상회 지시도 위반했다. 우리가 판결을 해도 누군가 박목사의 자격 문제를 건다면 판결이 무효가 될 우려가 있다.”라고 부질없는 염려를 하는 것 같아 보인다. 권징 조례 제19조의 “…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여 처리하라는 사건을 하회가 순종하지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처결권이 있다.”라는 헌법 규정은 “단순하게 상회가 하회에 시행할 것을 지시한 후 하회가 시행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시행하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시사항 외에 어느 누구를 시벌 한다거나 회원권 여부에 결부하는 것은 지나친 넌센스에 다름 아니다.  또한 이재천 목사는 권징 조례 제91조에 “소원자나 피소원자 된 하회 회원 등은 그 사건 심의 중에는 상회의 회원권이 정지 된다.”라는 헌법 규정을 오해하였다. 이 목사는 “권징 조례 제91조에 따라 박종일 목사의 재판국원의 자격이 정지되어야 한다.”라고 확대 해석하였으나 본 규정은 “소원이나 피소원 된 하회의 회원은 상회에서 그 사건을 심의하는 중에만 잠시 회원권이 중지 되는 것뿐이요, 재판국원 자격이 없다거나 재판국의 서기 자격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에 관하여는 재판국장이 “과거 재판국장에 대한 상소가 올라 왔는데 그대로 자격이 유지됐다.”라고 사례를 밝힘으로 더 이상 왈가왈부 할 것 없이 잘 처리되었다고 본다. 2. 제안자 반대 불가의 원칙 제안자 반대 불가의 원칙이란 자기가 제안한 안건은 결코 자기는 반대할 수 없다는 법리이다(교회 법률 상식 pp. 46-47). 예를 들면 어떤 교회가 예산편성을 할 때에 예결산 위원회가 제직회에 제안하면 제직회에서 예결산 위원은 안건에 결코 반대할 수가 없고, 제직회가 결의해서 공동의회에 제안하면 제직회원은 제직회를 할 때 찬성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을 무론하고 공동의회에서 반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총회 재판국원이나 재판국의 임원들까지도 모두 다 재판국원들이 세웠는데 본인들이 뽑아서 세워 놓고 자격이 없으니 물러나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재판국원을 총회가 세웠을 때 재판국원들도 총회원이요, 임원을 세울 때도 재판국원들이 세웠으니 국원들이 제안자로서 재판국원들끼리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시비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법이 정한 바이다(권징 조례 제94조). 3. 결론 일부 재판국원들이 “재판국원끼리 서로 보호해야 한다며 해당 문제는 잠재하자는 주장”과 같이 백해무익한 재판국원의 자격 시비는 종결하고 최종심인 총회 재판국의 면모로서 오직 법으로 승리하는 재판국의 판결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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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8
  • [기고] 학교법인 이사회 보고서에 대한 반론
    제72회 총회에서 상정된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연혁(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 수정 청원건> 에 대한 학교법인이사회의 보고서가 제73회 총회 회순(123p 참조)에 보고되었다. 우선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안건으로 상정해 주신 3개 노회와 지난 1년 동안 이를 심의하느라 수고하신 학교법인이사회 소위원회 위원들과 관계자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이사회가 본 건을 심의하면서 참고자료로 ‘복음병원 사령원부’, ‘제3영도교회 당회록’ 등을 인용했고, 참고인으로는 이상규 교수, 정남환 교수, 오경승 병원장, 김영대 원목실장, 조긍천 목사, 정수생 목사 등을 출석시켜 의견을 청취했다고 했다. 이사회의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에 대한 보고서 전문을 접한 필자는 우려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사회는 사료 전체를 인용치 않았고, 의도하는 결론을 위해 일부만 인용하고 있었다. 이미 오기된 역사자료를 표준인양 인용하기도 했다. 마치 “복음병원 역사는 수정할 것이 없다” 는 결론을 위해 짜맞추기식 논의를 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갖게 했다. 아직 총회가 개회되지 않았지만 첫 문제 제기자로서의 책임감과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총회 총대들이 본 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관점으로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이해하고 토의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기 제출된 이사회 보고서에 대한 필자의 소견과 반론을 준비했다. 1. 학교법인 이사회 보고서 내용은 다음 3가지로 요약된다. 1) ‘설립자’는 전영창선생이 설립했음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전영창, 한상동, 장기려 3인이 동역하여 설립했다”는 ‘설립자 3인설’을 인용했다. 2) ‘설립일’ 건은 제3영도교회 당회록과 복음병원 사령원부를 근거로 1951. 1. 15일이 아니라 1951. 6. 21일임을 종전 그대로 인용했다. 3) ‘초대원장’ 건은 복음진료소 첫 의사는 차봉덕 의사임을 인정하면서도 사령원부를 근거로 차봉덕이 초대원장이 아니라 장기려가 초대원장임을 인용했다. 결국 이번 이사회 보고서는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은 수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사회가 위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 주요 자료는 ‘제3영도교회 창립사’와 ‘복음병원 사령원부’였다. 이 두 자료를 근거로 복음병원 역사는 수정할 것 없이 복음병원 설립은 전영창, 한상동, 장기려 3인이, 설립일은 1951. 6. 21일, 초대원장은 장기려박사라는 종전의 역사를 수정없이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인용했다. 그렇다면 정말 이사회는 위 두 자료를 정확히 인용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사회는 위 두 자료를 사실대로 인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제3영도교회 역사는 앞 부분은 가린체 연혁 뒷부분만 인용함으로 총대들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도록 했다. 2. 이사회의 제3영도교회 당회록 및 발간사 인용 문제 이사회가 실수한 가장 결정적 장면은 제3영도교회 역사를 인용함에 있어서 역사 전부를 인용치 않고 당회록 앞부분에 있는 발간사만 인용했다는 점이다. 보고서를 보면 “제3영도교회 창립사에 의하면 주후 1951년 3월 6일 마산에서 개최한 제 54회 경남노회에서 인가받았고, 동년 3월 23일 예배당 공사를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월 하순에; 마루를 놓고 6월 3일 주일부터 예배를 보고, 9월 중순에 공사를 필하기로 되었다.”라고 하면서 “1951. 1. 15일에 제3영도교회에서 구제회와 진료소를 함께 시작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라고 결론 지었다. 이사회의 보고서처럼 제3영도교회는 1951년 3월 6일 경남노회 인가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니다. 제3영도교회는 이보다 2년 전인 1949년 8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제3영도교회 연혁을 보면 1949년 8월 7일 제일영도교회에서 영도 4개처 교회를 설립키로 하고 수요일부터 박상순전도사 인도로 42명이 모여 개척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고 있다. 1950년 3월 17일 202평 부지 매입, 1950년 11월 1일 가설예배당 완공, 1951. 3월 6일 경남노회에서 인가를 받았다. 이사회는 제3영도교회 역사의 앞부분은 전혀 인용치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제3영도교회 시작점을 1951년 1월 15일 이후로 해야만 1951년 6월 21일을 병원 개설일로 꿰맞출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만일 이사회가 1951년 1월 15일에는 시기적으로 병원을 시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교회역사 앞부분 2년은 생략하고 뒷부분만 인용했다면 이는 중대한 오류요 실수다. 제3영도교회의 연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1951. 6. 21일을 설립일로 옹호하기 위해서 한 교회의 역사마저 왜곡 인용했다면 이는 총회를 눈가림으로 속이려했고 또 다른 역사왜곡을 획책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한 실수인지 왜 그렇게 했는지 반드시 밝혀 주시기 바란다. 3. 복음병원 ‘사령원부(辭令原簿)’ 인용 문제 이사회가 복음병원 역사에 준거처럼 인용한 ‘복음병원 사령원부’는 과연 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에 대한 결정적인 문서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원부는 보고서의 인용과는 달리 설립자는 전영창, 초대원장은 차봉덕임을 더 확실히 입증해 주는 문서이다. 우선 이 ‘사령원부’는 가치 있는 사료(史料)일까? 이는 이 자료를 누가, 언제, 어디서 작성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검토해야 한다. 만일 이 사령원부를 1951년, 영도에서 전영창이나 장기려, 또는 당시 원무과에서 작성했다면 이 문서는 복음병원 역사에 결정적인 사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려 15년이 지난 이후 누군가에 의해 정리된 문서였다. 1) 이 ‘사령원부’는 1951년 영도에서 작성된 문서가 아니다. 이 사령원부 표지에 ‘主後 1951年 以降’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뜻 보면 마치 1951년에 기록한 문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以降(이강)이란 이후(以後)라는 뜻으로 1951년 설립이후 복음병원 직원의 임명내용을 정리해 둘 목적으로 기록한 명부란 뜻이다. 또한 이 문서는 부산 영도에서 작성된 문서도 아니다. 표지 왼편에 보면 이 문서를 작성한 장소가 명기되어 있다. “부산시 암남동 산 34번지 복음병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이 문서의 기록장소가 병원이 설립된 영도가 아니라 암남동 송도에서 작성된 명부임을 밝혀준다. 먼 훗날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2) 이 문서는 1965년 이후 이재술 장로가 작성한 명부였다 역사기록에서 누가 기록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사건 당사자인 장기려나 전영창, 또는 당시 원무과에서 기록한 문서라면 그 의미가 클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필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복음병원 서무과장이셨던 이재술 장로의 필체였다. 이재술 장로 가족에게 이 명부의 필체를 확인 요청했다. “제 부친의 글씨체가 독특해서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데 너무나 비슷합니다.”라는 답변이었다. 또 다른 유력한 원로에게 이 사령원부의 작성자가 누구일까요? 라는 질문에 “그 당시에 이런 문서를 작성할 분은 서무과에 근무한 이재술 장로님뿐이다”고 답변했다. 이재술 장로는 1965년부터 복음병원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거창고등학교에서 전영창 선생과 함께 서무과장으로 8년간 근무하다가 장기려 박사의 요청으로 1965년 2월 4일 부산복음병원으로 부임, 1971년 12월 31일까지 약 7년간 근무하셨다. 그렇다면 이 사령장부는 1965년부터 1971년 사이에 작성된 문서가 확실하다. 복음병원설립 후 15년~22년 어간에 이재술 장로가 작성한 사령원부는 그 당시 회자 되는 구전과 자료들을 근거로 작성된 것임은 자명하다. 이때는 이미 전영창이나 차봉덕은 복음병원 역사에서 배제된 때였고 장기려 중심의 역사로 재편되어 고착된 때였다. 복음병원 설립일도 이미 1951. 6. 21일로 지키고 있었으니 사령원부에도 첫 발령일을 6월 21일로 기록했다. 이 사령원부가 나중에는 복음병원의 정사(正史)로 변착(變着)되어 ‘고신의료원 50년사’에도 그대로 인용 되는 등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3) 이 사령원부는 전영창 선생이 설립자임을 밝혀준다. 이 사령원부에서 제1호로 임명된 직원은 총무 전영창이다. 누가 임명했나? 전영창이 전영창을 발령했다. 발령처 대한기독교경남구제회 대표자가 전영창이기 때문이다. 경남구제회(법인격) 이사장인 전영창이 병원의 총무로 자신을 임명한 것이다. 당시 전영창은 법인의 대표나 직함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병원의 총무로 임한 것은 본인 스스로가 총무로 자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병원초기 총무처럼 모든 시설, 장비, 의료기 구입, 수선, 운영일체를 도맡았다. 그래서 장기려박사도 당시 전영창을 ‘총무요 설립자’라고 표현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설립자가 법인과 병원의 대표자가 된다. 지금의 의료법상으로도 그렇다. 이 사령원부가 비록 전영창을 병원의 총무로 임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법인과 병원의 대표자요 설립자인 것이다. 경남도청도 1951. 12. 23일 복음의원을 의료기관으로 인가하면서 전영창을 병원의 대표자(경남도보 제 103호, 개설대표자 전영창)라고 명시했다. 주무관청이 전영창을 설립자요 대표자로 허가했으면 병원설립자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금번 보고서가 전영창, 장기려, 한상동 3인이 동역해서 설립했다는 병원설립자 3인설을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는 주무관청의 허가마저 무시한 것이고 의료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개원할 때 한상동 목사는 전여 관여치 않았고, 장기려 박사는 6개월 후에야 2대 원장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분이 공동 설립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의료법 제33조(개설 등)는 법인 또는 의사 1명만이 의료기관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사회가 복음병원 3인 설립설을 인용하려면 최소한 대한민국 의료법이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한 상식은 가지고 인용했어야 했다. 3인 설립설이 불가능한 4가지 이유는 필자의 “나삼진목사의 복음병원 설립자 3인설에 대한 반론”(기독교보 2022. 7.13일자)을 참고하기 바란다. 4) 이 사령원부는 차봉덕의사가 초대 원장임도 밝혀준다. 이 사령원부는 인사발령 제2호 차봉덕을 의사로, 제6호 장기려를 원장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이 원부는 차봉덕을 첫 번째 의사로 임명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의료법 제33조에 따르면 처음 개설하는 의사가 원장이고 초대원장이 된다. 대한민국 의료법 제 33조 8항(그 밖의 규정)에는 “의료인은 의료기관 개설시 어떠한 명목으로도 둘 이상의 의료기관을 개설 운영할수 없다”로 되어 있다. 한명의 의사가 둘 이상의 의료기관에 중복해서 근무해도 불법이 된다. 장기려박사는 6월 말까지 제3육군병원에 외과과장으로 계속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7월 2일에 부임했다. 개설시 있지도 않은 장기려를 초대원장이라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비록 이 원부가 기록자에 의해서 차봉덕을 의사로, 뒤에 부임한 장기려를 원장이라고 기록했다 해도 의료법상으로는 처음 개설한 의사가 원장이 되는 것이다. 모든 판단 기준은 법을 따라야 한다. 따라서 이 사령원부는 의료기관 개설에 대한 의료법에 반하는 인위적 기록이다. 이사회 보고서가 아무리 장기려를 초대원장이라 강변해도 이 사령원부는 오히려 차봉덕의사가 초대원장임을 입증하고 있다. 사실(fact)을 호도, 왜곡한 기록은 역사가 될 수 없다. 이 기록은 기록자 또는 주변의 의도가 개입된 기록, 즉 차봉덕을 배제하고, 장기려를 초대원장으로 만들기 위한 인위적 기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기록이 중요하지만 사실을 왜곡한 기록은 역사가 될 수 없다. 5) 대한기독교경남구제회와 복음진료소는 동시에 설립했다. 이사회 보고서는 경남구제회와 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할 수 없다고 했다. 1주일 만에 두 기관을 설립하는 것은 ‘무리’라는 주관적 해석으로 1951. 1. 15일 병원 설립일을 부정하고 있다. 부정하려면 이를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사료를 제시해야 함에도 이사회는 그 어떤 사료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무리’라는 추론으로 부정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법인과 수익기관(병원)은 동시에 설립한다. 심지어 병원설립이 되지 않으면 법인허가도 인가되지 않는다. 6.25전쟁 중 5천불 구호금을 가지고 미국에서 급거 귀국한 전영창 선생이 불과 1주일 만에 구제회(법인)와 진료소를 설립한 것이 왜 ‘무리’라고 억측하는가? 당시는 전란 중이었고 수십만의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와 구호를 위해 백방으로 뛰며 마음이 급했던 전영창이 1주일 만에 구제회와 진료소를 준비하는 것이 왜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가? 지금의 여유있는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안된다. 그때는 그만큼 시대가 급박하고 긴박했었다. 또한 당시에는 국민의료법이 제정되기 전이므로 의사가 진료하는 곳이 집이든 창고든 어디서나 병원개원이 가능했다. 의료법이 없는 시대에는 의사만 있으면 이틀만에도 병원 개원이 가능하다. 구제회와 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1월 설립 후 불과 두달 후인 그해 3월 경남노회가 각 교회로 하여금 헌금하여 보내 주도록 결정한 것은 경남구제회가 운영하는 진료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은 부산 영도로 이사를 오니 진료소 앞에는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재료(밀가루 옥수수 등)로 끓인 죽을 받기 위해 선 줄이 200m는 되었다고 회상했다. 경남노회가 결의해서 보내 준 구호헌금은 이렇게 쓰인 것이다. 경남구제회와 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했다는 것은 설립자 전영창의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전영창은 그의 자서전격인 전영창 전집Ⅱ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연혁에서 “1951. 1. 15일 피난민 무료진료소 복음병원을 개설”했다고 남겼다. 그의 장례식 연혁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고 되었다. 그의 아들 전성은이나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설립자 본인이 1. 15일 구제회와 병원을 설립했다고 설교시나 강연때 자주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이사회가 이를 부정할만한 사료나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리”라는 말로 부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 외에도 1. 15일 병원을 설립했다는 여러 근거 및 자료는 많다. 필자의 <복음병원 숨겨진 초기역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4. 마무리 하며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다룬 이사회의 총회 보고서 결론은 “복음병원 역사는 수정할 것이 없다”였다. 필자는 이사회가 그 근거로 제시한 ‘제3영도교회 역사’와 ‘복음병원 사령원부’의 실체를 분석하면서 그 인용이 부적절했음을 지적했다. 이 두 문서는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반대할만한 사료가 될 수 없다. 오히려 3개 노회가 제출한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지지하는 사료들로도 볼 수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사회 보고서는 제3영도교회 역사를 잘못 인용했다. 사령원부 또한 복음병원설립 후 15년 이후 작성된 문서로서 이미 전영창과 차봉덕이 복음병원 역사에서 배제되고 장기려 중심의 역사로 고착된 때 작성된 문서임을 밝혔다. 이 사령원부가 나중에는 복음병원의 정사(正史)로 변착(變着)되어 ‘고신의료원 50년사’에도 그대로 인용 되었고 오기된 역사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신총회 70년사(총회출판국, 2022)에서는 설립자는 전영창, 설립일은 1951. 1. 15일, 초대원장은 차봉덕을 정사(正史)로 남겼다. 바라옵기는 이번 고신총회가 3개 노회에서 제기한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객관적 사료들을 기준으로 검토해 주시고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단의 역사학자들과 관계자들이 공청회나 학술발표회 등을 거치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합의점을 도출하여 복음병원 역사와 연혁을 수정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5. 수정해야할 복음병원 정사(正史)는 무엇일까? 1) 복음병원 설립자는 전영창선생이다. (1) 장기려 박사의 증언. 장기려 박사는 복음병원 회보인 ‘영아와 유아의 찬미’(창간호) 권두사에서 전영창을 일컬어 “설립자 전영창씨는”(장기려, 영아와 유아의 찬미 창간호, 1951)이라고 칭했다. 복음병원 회보 제4집(1976년)에서도 “본원의 설립자이며 총무 일을 보아 주셨던 전영창 선생”이라 했다. 또한 한국일보 연재기사(1976년)에서도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씨와 함께” 라는 설명을 사진과 함께 남겼다. 그 외 그의 자서전 등 여러 곳에서 설립자는 전영창임을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각종 언론, 세미나에서 장기려박사를 설립자라고 말한다. 복음병원 연혁에 아직도 설립자를 전영창으로 표기하지 않고 있다. (2) 주무관청인 경남도청의 확인 1971년 발행된 복음병원 회보 <영아와 유아의 찬미> 제 3집 복음병원 연혁에 “1951. 12. 23. 복음의원 개설 허가받음(경남도보 제 103호, 개설대표자 전영창)”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경남도청이 복음의원 설립자를 전영창으로 확인해 준 것이다. 주무관청이 전영창을 개설대표자로 인정했으면 다시는 3인설 같은 주장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3) 황영갑(차봉덕원장 남편), 전성은(전영창의 아들), 차진실(차봉덕원장의 조카), 맹숙희(초창기 간호사), 성소균, 이재술, 지강유철, 이상규 교수 등 수많은 분들이 전영창선생을 설립자로 증언했다. 2) 복음병원 설립일은 1951년 6월 21일이 아니다. (1) 1951년 6월 21일은 장기려 박사가 제 3육군병원에 재직 중일 때다. 지강유철의 장기려 자서전에는 “1951. 6. 21일 한상동, 전영창, 그리고 경남구제위원회 회계 김상도 목사와 함께 제 3육군병원(외과과장 장기려박사 근무지)으로 찾아갔다. 선생은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고는 채 열흘이 되기 전인 6월 30일 제3육군병원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6월 21일은 전영창이 외과의사를 구하기 위해 한상동목사의 소개로 장기려박사를 만난 날일뿐이다. 6월 21일이 개원일이 될 수 없는 이유다. (2) 경남노회 회의록도 1951년 6월 이전에 설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3월 6일~8일 마산문창교회에서 개최된 제54회 경남노회에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승인하고 각 교회는 연보하여 구제회로 보내 주시되 연보는 4월 29일 주일 일제히 하여 주기로 함” (맹호원, 경남노회 회의록, 角丸인쇄소, 1929). 이 결의는 복음진료소가 1951. 6월 23일 이전에 이미 개설되었음을 의미한다. 3) 복음병원 설립일은 1951년 1월 15일이다. 1951년 6월 21일이 복음병원 설립일이 아닌 이상 이제 남은 것은 1951년 1월 15일뿐이다. 이 날짜는 전영창 전집Ⅱ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마루그래픽스, 2013. 9.15>의 연혁에서 확인된다. 또한 전영창 선생의 장례식 때 보고된 장례식 순서지 연혁에서도 “1951. 1. 15. 부산에 복음병원 창설”로 기록했다. 이에 대해 전성은은 “이 날짜는 아버지가 학교에서 설교나 훈시 시 자주 말씀하신 내용으로서 1951년 1월 9일 미국에서 유학 중 급거 귀국하여 1월 15일에 경남구제회와 복음병원을 설립하셨다고 말씀하셨기에 그것을 근거로 연혁에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전성은, 경남 거창 자택에서, 김세중, 고명길에게 증언, 2014. 5. 19) 4) 초대원장은 차봉덕 원장이다. 복음병원의 초대원장이 차봉덕이라는 사실은 장기려 박사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영도 복음진료소에 갔을 때 서울의전 출신 여의사(차봉덕)가 근무하고 있었고 이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또한 차봉덕의 남편 황영갑 목사의 자서전에서도 확인된다. 그 외 차봉덕원장의 조카 차진실 사모, 당시 간호사였던 맹숙희 권사, 전기기사 김종열장로 등의 증언에 의해서도 확인이 된다. 늦게 발굴된 복음병원 사령원부도 차봉덕을 첫 번째 의사로 재직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당시에는 의대 졸업장만 있으면 가정집이던 창고던 어디서나 개원할 수 있었다. 복음진료소도 의사가 진료하는 엄연한 병원이었다. 차봉덕원장이 6개월 만에 이임하고 전영창선생마저 3년 후 병원을 떠나자 장기려박사 중심으로 병원역사가 정리되다 보니 정영창, 차봉덕 원장의 이름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초대원장이 바뀔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법상 단 3일을 근무했다해도 첫 개설의사가 초대원장이 되는 것이다 6. 고신총회 총대님들께 드리는 고언 1) 학교법인 이사회의 보고서가 주관적 역사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 사료들을 정확이 인용했는지를 검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2) 검증 시 역사학자들의 사료(史料)에 근거한 설명과 관련자들의 의견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3) 다양한 의견이 있을 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다각적인 객관적 사료 조사와 연구, 학술토론, 공청회 등을 통해서 합의점을 도출하고 결론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병원의 숨겨진 역사는 단순히 복음병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영창 선생을 축출하고 역사를 오기한 분들 역시 고신의 초기 인사들이었기에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고신정신과 정체성 문제로까지 연결됩니다. 이런 점에서 총회의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 심의는 결코 가벼이 할 수 없으며, 그 역사적 소임과 책임이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이 분리될 때 교회당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새롭게 개척한 것은 물질을 초월하는 순교자적 신앙과 순수성이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복음병원문제에서는 왜 전영창을 부정축재자로 억지 탄핵하고 축출했었는지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천막병원에서 점점 확장되고 커져가는 복음병원 재산권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음은 그 당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전영창이 복음병원의 이사장으로서 훗날 자신의 재산이라고 주장할까 두려웠던 것일까요? 1953년 전영창을 탄핵하는 임시노회에서 조수옥, 전성도, 황철도, 김상도, 안용준, 최일영목사 등이 그토록 반대하며 전영창의 무고를 변호하고 항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앙의 정통과 순교정신을 강조한 고신을 향한 충고와 항변은 아니었을까요? 지체된 정의도 정의가 아니지만 불의한 결정과 왜곡을 그대로 지나치는 것은 더더욱 정의가 아닐 것입니다. 코람데오 정신도 아닙니다. 부디 바라옵기는 학교법인이사회와 총회는 몇몇 사람의 주관적 역사해석이 아니라 객관적 사료를 근거로 검증해 주시고,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기술방법에 따라 학술토론이나 공청회 등을 통해 공정하게 심의결정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더 확실한 새로운 사료가 나오면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따를 것입니다. 그동안 이 일에 수고하신 학교법인 이사회와 관계자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기고/강연
    • 기고
    2023-09-11
  • [기고] 식사
    식사는 대접을 받기도 하고 대접을 하기도 하고 때론 때우기도 한다. 식사를 때운다는 것은 시간이나 여건이나 음식이 부족하여 급하게 먹음을 말한다. 원래 의미는 “대신하여 불충분한 대로 넘기다.”로 대충 불충분한 대로 먹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식사에 관한 내용 중에 [마태복음 12:1]에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사마리아로 가는 길에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가서 돌아와 보니 이미 식사를 하신 예수님의 일화가 있다. 또 오천 명의 군중이 배가 고파 기진할 때 제자들이 찾은 것은 예수님만 겨우 때울 오병이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축사하시니 배불리 먹고도 남을 식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준비한 때울 것을 예수님이 식사로 만드신 비결은 무엇인가? 가나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 그 처음이었다. 물은 식사가 될 수 없으나 포도주는 식사에 포함이 된다. 또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애제자 둘을 보내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자를 따라가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게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식사는 물이 포도주를 만들어지듯이 준비되어 진다. 여기서 우리는 오병이어로 돌아가 진정 음식으로 섬긴 자는 누구일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셨고 장정 5천명과 그들의 주변인들을 다 먹이고도 다섯 광주리가 남게 되었다. 모두가 예수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며 그를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려 했을 때 오히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섬긴 한 아이로 부터 시작된 식사를 기뻐하신 것이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는 식사자리에서 한 여인이 가져와 깨뜨려 부은 옥합에 든 향유를 드셨다. 이는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영접하여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됐다고 하신 것처럼 이러한 식사로 예수를 섬기려는 자들을 통해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배불리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가끔 우리는 때우듯이 식사를 한다. 밀밭을 지나가며 이삭을 자르듯이 급히 먹는다. 그러나 주님은 적은 것으로도 섬기는 자를 보시고 축사하시고, 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게 하라” 하시듯, 최후의 만찬 때 살과 피를 내어 준 자신을 기억하라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그의 축사를 통해, 때우는 끼니가 아닌 성찬이 될 수 있도록 날마다 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기고/강연
    • 기고
    2023-08-24
  • [기고] 솔로몬의 재판과 예수님의 재판
    솔로몬의 재판은 일천번제를 드려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고 그로인해 지혜로운 판결을 내린 솔로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판은 간음하다 끌려 온 여인이 용서를 구했고 여인을 죽이고자 돌을 들고 선 자들에게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모두 돌을 놓고 여인을 용서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 솔로몬의 재판이 솔로몬의 지혜를 칭찬했다면 예수님의 재판은 돌을 들고 선 자들이 여인의 죄를 용서하는 자비에 이르렀음을 기록한 것이라 하겠다. 모든 재판은 재판관이 하지만 솔로몬 때나 예수님 때나 재판을 바라보는 시민들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한 돌들이 쥐어져 있다. 좋은 재판은 그들의 손에 든 돌들을 어떻게 내려놓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재판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명판결을 한 솔로몬의 지혜에 놀란 군중들이 자신의 돌을 내려놓고 일천번제와 같은 제사로 나아오게 한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재판은 자비를 구한 예수님의 말씀에 찔린 군중들이 자신의 돌을 내려놓고 용서의 자리로 나아오게 하신 사건이라 하겠다. 결국 이는 일천 번제를 드려 얻는 지혜보다는 간음하다 끌려 온 여인을 용서 할 수 있는 자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으로 우리가 올려드리는 예배를 통해 더 나은 지혜를 구하기보다는 더 자비로운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구하라는 것이다. 또 이는 예배를 드림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이기는 지혜를 구하기보다는 타인을 용서하는 자비로운 마음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라 하겠다. [마태복음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 기고/강연
    • 기고
    2023-04-20
  • [기고] 어머니 배남호 권사님을 그리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절) 저희 어머님 배남호 권사님이 100년의 삶을 마감하고(1924.5.25음-2023.4.1) 지난 4월 1일 토요일 밤 9:58분에 천국,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토요일 밤, 주일, 고난주간 등 경황이 없어서 어머님 천국길 다 마치고 늦게나마 어머님과 저희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전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많은 목사님 장로님 성도님들이 말씀과 기도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위로예배(오정현 목사님, 백승준 목사님, 고성삼 목사님, 천환 목사님), 위로예배(이한식 목사님, 심종화 장로님), 입관예배(김용의 선교사님, 조생준 목사님, 옥금석 장로님), 발인예배(강성관 목사님), 하관예배(권오헌 총회장님, 길성구 장로님, 홍콩엘림교회 조윤태 목사님), 안장예배(46회 동기, 장종환,김일영 목사님, 노상규 목사님,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장님). 저희 어머님 배남호 권사님의 100년은 참 고달프고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49-50세 2년간 병으로 고생하셨으나 약도, 의사도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의학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기 위해 고향을 떠나서 3살 위 형과 제가 자취하던 마산으로 오셨습니다. 당시 마산창원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고려병원(현 삼성창원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어머님은 기운이 없어서 늘 누워계셨고 모기소리만큼 작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엄마가 3개월이면 돌아가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16살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고향을 떠나올 때 동네 아주머니들이 각골댁(어머님) 이제 더 이상 못보는구나 하셨습니다. 그 때 그 불쌍한 저희 가정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서마산교회를 설립한 박순병(국민학교 교장) 장로님의 부인 조숙정 집사님(권사, 천국)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새신자가 왔다고 김태윤 목사님(미국 거주), 박순병 장로님(천국)과 성도님들이 심방 오셔서 예배, 기도해 주시고 그 후 40대 중반의 기도를 많이 하는 허해옥 집사(권사, 천국)님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거의 매일 저희 자취방에 오셔서 2-3시간씩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 6개월 동안 물 한 컵 대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불쌍한 저희 가정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매일 찾아오셔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교회에 출석한지 6개월쯤 된 어느 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3개월이면 돌아가실 것 같았던 저희 어머님이 6개월이나 되었는데도 살아계셨을 뿐만 아니라 병이 완전히 나아버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올려드립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약도, 병원도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교회에 나갔고 김태윤 목사님과 박순병 장로님, 제4문창교회 성도들이 와서 심방 예배드려 주셨고 허해옥 집사님이 거의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셔서 기도해준 것 밖에는 없는데 죽어가던 우리 어머님이 살아나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 어머님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꼭 배로 사셨습니다. 그리운 저의 어머님 배남호 권사님은 지난 4월 1일 토요일 밤 10시에 그렇게 그리던 저 천국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불신 가정이었던 저희 가정에 예수님 찾아오셔서 큰 구원을 이루시고 많은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어머님과 두 딸이 권사로, 막내 아들인 제가 목사로, 외손자 김석홍 목사(향상교회 담임), 친손자 박대선 목사(성안교회 부목사)가 되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예수님 믿고 영육간에 참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어머님 배남호 권사님을 주님의 품에 올려드리며 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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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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