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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웅 목사]예수 데칼코마니(Decalcoma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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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게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조롱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니다.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거였다.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할 수 없는 것’은 ‘무능(無能)’이다. ‘하지 않는 것’은 힘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힘이 있다고 유능(有能)이 아니다. 힘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유능이다. 핸들링(handling) 되지 않는 힘은 폭력일 뿐이다.
유능과 함께 힘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붙여줄 수 있는 단어가 겸손이다. 무능해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무능이다. 무능한 사람이 겸손한 척, 하는 것은 비굴(卑屈)일 뿐이다. 그러나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다루는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겸손이란 단어가 결코 어울릴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교만이나 무례(無禮)일 것이다. 자기가 가진 유능을 잘 다루어 적재적소에 써야 할 때 쓸 줄 아는 사람을 겸손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무능한 분도, 교만한 분도 아니다. 말씀 한마디로 12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는 분이다(마 26:51). 그러나 그렇게 하셨다면 성경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의 유능을 조절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힘은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써야 한다. 타의에 의해 목 박히는 것은 무능이다.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유능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 하신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란다. 그러면 많은 열매로 부활한단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렇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도 다른 밀알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은 많은데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자신이 죽는 밀알 되기보다는 다른 밀알을 죽여 자기만 살려는 사람들만 많은 것 같다.
미술에 데칼코마니(decalcomanie)라는 기법이 있다. 어떤 무늬를 특수한 종이에 찍어 얇은 막을 이루게 만든 뒤 다른 표면에 옮기는 전사(轉寫) 기법을 말한다. 미술 수업시간에 종이 한쪽 면에 물감을 마음대로 짜 놓은 후, 종이를 반으로 접어 손으로 문질러 펼치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양의 그림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의 데칼코마니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웬만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 기독교 방송을 듣지도, 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비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데칼코마니같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 인격, 언어, 남을 대하는 태도, 시선, 마음 씀씀이까지 예수님의 데칼코마니가 되어 예수님의 삶을 우리 삶의 현장에 전사(轉寫)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요즘에 노아 시대의 데칼코마니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데칼코마니들을 이기려면 우리는 진하고 선명한 예수님의 데칼코마니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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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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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석 목사]은퇴 규정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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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은퇴하는 목회자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베이버 부머 세대가 은퇴하는 시기이므로 앞으로 더욱 그 숫자는 많아질 전망이다. 지금 은퇴하는 6070세대는 온몸으로 목회에 전념하여 매진해 온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헌신은 지금의 3040세대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은퇴 준비를 한다는 것은 불신앙 내지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과거의 6070세대가 사역하던 시절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현재의 형편에만 맞춰 은퇴에 따른 제반 준비를 하려는 움직임은 은퇴를 앞둔 목회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어느 도시에 소재하는 교회에서 27년간 시무한 후 은퇴한 목회자에게, 지금 지급되고 있는 생활비에 사역 햇수를 곱한 금액의 퇴직금만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별도의 생활비도 없이 약간의 총회 연금이 전부였다. 은퇴 후 거주할 주택을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친척들이 주거할 공간을 마련해주었고, 자녀와 형제들이 생활비를 부담해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한평생을 바친 목회자의 생활 대책을 거의 마련하지 못한 경우이다.
그런가 하면 수도권의 한 교회에서는 23년간 사역한 후 은퇴하는 목회자를 원로목사로 추대하기로 하고, 원로목사 명의로 된 아파트와 법정 퇴직금의 몇 배에 달하는 금액을 지급하고, 현재 지급되고 있는 생활비의 70%와 아파트 관리비 및 건강보험에 차량까지 제공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최근 요양원을 신축하여 수십억의 부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한 것이 널리 회자하고 있다.
교단 총회나 지방회에서 마련해야
사람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은퇴를 앞두고 상실감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특히 한평생 교회만을 생각하며, 목회의 길을 달려온 6070세대 목회자는 은퇴를 생각하거나 준비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각 교회는 한 평생 교회만을 생각하며 헌신한 목회자의 은퇴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각 교단 총회가 기준을 마련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지방회나 노회 차원에서라도 마련할 수 있었으면 한다.
목회자의 은퇴에 관한 규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총회에 속한 지방 어느 노회에서 규칙으로 정한 것을 소개해 본다. 은퇴목사의 퇴직금은 매월 지급하는 생활비(목회비, 도서비 등 포함)에다 시무 연수를 곱한 금액에다 소정의 위로금을 지급토록 하였고, 조기 은퇴일 경우에는 이를 교회가 감안하도록 규정하였다. 20년 이상 시무한 후 원로목사로 추대할 때는, 〈교회헌법〉에 따르되 매월 드리고 있는 금액에다 사역 햇수를 곱한 금액을 퇴직금으로 지급하며, 위로금과 생활비를 평생 지급하도록 하였다. 생활비는 70%를 원칙으로 하며, 원로목사가 별세한 후에는 목사 부인에게는 지급되고 있던 금액의 60%를 지급토록 하였다. 차량구입비도 별도로 규정하였지만, 이러한 기준에 의해 정산하되 개체교회의 형편을 고려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총회 수도권 한 노회의 규칙은 이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다. 20년 이상을 시무하여 원로목사로 추대되는 경우와 그에 미달하여 은퇴하는 경우 등을 세세하고 규정하고 있는데, 원로목사가 아닌 경우의 은퇴금은 목사가 은퇴하는 해에 매월 수령하던 금액에 시무 햇수를 곱한 금액을 지급토록 하는 것은 대동소이하나 그 금액의 30% 이상을 위로금으로 지급토록 하였다. 은퇴하는 목사의 공적을 헤아려 선대함이 마땅하지만, 이 기준으로 해당 교회가 결정하여 시행하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노회 대책위원회에서 조정하도록 규정하였고, 노회에는 특별 상설기구로 ‘원로및은퇴목사예우대책위원회’를 두되, 2년 임기의 위원은 증경 회장단에서 목사 4명, 장로 3명으로 하고, 선출은 노회 임원회에서 위촉하며, 연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원로목사로 추대할 때는 주택을 원로목사 명의로 제공하고, 퇴직금과 적정 금액의 은퇴 위로금을 지급토록 하였다. 생활비는 담임목사의 70%로 하며, 원로목사가 사망한 경우 원로목사 부인에게는 지급하던 금액의 50%를 계속 지급토록 규정하였다. 다만 원로목사가 담임목사로 시무하던 기간의 15년 이상 교회에서 함께 시무한 경우로만 한정하고 있으며, 원로목사 부부의 건강보험을 종신토록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전국교회나 지역의 모든 교회에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은퇴 규정을 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개교회가 참조할 수 있는, 노회나 지방회 단위의 규정이 있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은퇴 규정, 준비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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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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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가정의 달, 가정이 아픈 시대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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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사랑과 감사의 가치를 다시 떠올린다. 부모의 은혜를 말하고 자녀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저녁이 있는 삶, 삶이 있는 저녁이 소환된다. 이렇듯 각자의 방식으로 가정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가정은 여전히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다.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가 쌓이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가정은 여러 모습으로 흔들리고 있다. 가족이 함께 살아도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다. 대화는 점점 줄어들든다. 각자의 스마트폰과 일상 속으로 흩어진다. 부모는 생계와 책임의 무게에 짓눌린다. 자녀는 경쟁과 불안 속에 자라난다. 노년의 부모는 돌봄의 사각지대에서 외로움과 싸운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속으로는 지쳐 있는 가정이 많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사랑할 힘마저 소진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가정의 아픔이 점점 사적인 문제로만 취급된다는 데 있다. 부부 갈등도, 세대 갈등도, 자녀 문제도, 노인 고립도 각 가정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몫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가정의 위기는 결코 한 집안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병리다.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할 시대의 과제다. 가정을 지탱하던 가치가 약해진다. 관계를 회복하는 기술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기술이 앞선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때에 교회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져야 한다.
교회는 단지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 아니다. 상처 입은 영혼과 깨어진 관계를 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무너져 가는 가정을 바라보며 훈계만 하는 곳이 아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곳이어야 한다. 가정을 향해 이상만 제시하는 곳이 아니라, 현실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들어야 한다. 지친 부모의 한숨을 들어야 한다. 말문을 닫아버린 청소년의 침묵을 들어야 한다. 홀로 남겨진 노인의 적막을 들어야 한다. 교회는 판단보다 공감으로, 지적보다 위로로 다가서야 한다. 또한 교회는 실제적인 돌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부부가 함께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부모 교육과 자녀 이해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 청년과 청소년이 마음 놓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멘토링 체계를 세울 수 있다. 사별 가정, 독거노인,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을 향한 구체적인 돌봄도 필요하다. 가정의 위기를 개인의 신앙 부족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깨어진 자를 정죄하는 말이 아니다. 다시 품고 회복하게 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는 가정의 본질을 다시 일깨워야 한다. 가정은 성과를 평가하는 곳이 아니다. 조건 없이 받아 주는 자리이다. 가정은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부족한 존재들이 용서와 인내를 배우는 자리이다. 가정은 세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돌아와 숨을 고르는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런 가정이 되도록 돕는 영적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가정의 달을 맞으며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 가정은 서로에게 안식이 되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지친 가정을 살리는 품이 되고 있는가. 행사와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회복의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도 흔들린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도 산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는 시대의 가정 앞에 더 깊은 책임감으로 서야 한다. 축하의 말에 머물지 말고, 회복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가정의 달은 기념의 시간이기 전에, 다시 사랑을 배워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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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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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봉목사]죽음에서 살아나려면 좋은 이웃을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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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은『닥터 지바고』(1957발표)의 작가 파스테르니크(1890-1960)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대표적인 반체제 작가로 꼽힌다. 청년 시절 소련군 장교로서(대위,소령) 2차 대전에 참전하였다. 1945. 8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포병장교로 복무하던 중 독재자 스탈린의 지도자로서의 분별능력을 의심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는데 검열에 걸려 1945. 11월 투옥되어 무려 10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매섭게 추운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내던져진 솔제니친의 30대~40대 청년 시절은 허망한 세월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보리스 콘펠드(Boris Kornfeld)박사를 만난 것이다. 콘펠트 박사는 유태계 소련인으로서 의사였다. 어떤 자리에서 “스탈린은 신이 아닌 인간이다”라고 말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 던져졌다. 의사로서 그는 수용소의 죄수들이 놀고 지내지 못하도록 ‘노동형벌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음’이라는 진단서를 무조건 발부하도록 수용소 당국으로부터 강제당한다. 그 명령을 따르다 보니 그의 치료행위는 기계적, 형식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의사로서의 자신의 인간성이 말살돼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렇게 갈등하고 있던 중 동료 죄수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으며 절망의 바닥을 벗어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인간됨의 가치와 특히 의사로서의 소명감을 확실히 회복하게 된다. 수용소 당국은 더 이상 노동가치가 없는 환자는 죽음으로 방치하라는 지시를 받지만 최선을 다하여 환자 죄수들을 살려낸다. 어느 날 대장암에 걸려 죽어가는 남자 환자 죄수를 치료하게 되는데 수용소장의 엄명대로라면 방치돼야 하고 곧 죽음으로 끝날 환자였다. 콘펠트 박사의 정성어린 치료로 사경을 벗어나 소생 가능성이 확실해졌을 때 그 죄수(환자)가 의사에게 나직이 물었다. “이렇게 저를 치료해 주시면 선생님의 목숨이 위험해지는데 왜 위험을 감수하십니까?” 의사가 작은 미소를 보이면서 대답하였다. “괜찮아요, 당신과 나를 영원히 살리기 위해 이미 죽어주신 이가 계시니까요.”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그 환자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한 그 의사는 “그 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라고 속삭여 주었다. 콘펠트 박사의 이러한 특이한 의술행동을 의심하면서 살펴오던 수용소장은 마침내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유태인 의사 보리스 콘펠트 박사는 많은 죄수들의 애통 가운데서 처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기적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박사의 처형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그 죄수 환자는 자신을 치료해 살려주던 그 의사가 전해준 복음을 기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러면서 다짐을 한다. “보리스 콘펠드 박사님, 이제는 내 차례입니다. 이제는 내가 그 분을,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 이름을 전하겠습니다”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그 내면에는 소망과 확신이 차고 넘쳐 흘렀던 그의 이름은 바로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이었다. 이윽고 10년간의 수용소 노동형벌이 끝나고 풀려난 그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힘을 얻으면서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암 병동』(1968),『수용소 군도』 (1973), 『공산주의: 공포의 유산』( 1975).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작품(소설)으로 197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그를 반체제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어 스웨덴 한림원에서 거행하는 수상식 참석을 위한 출국을 불허한다. 당연히 세계 여론이 들끓었으며 마침내 1974. 2. 13 소련 당국은 ‘추방’ 형식으로 솔제니친의 출국을 허용한다. 미국이 그의 망명을 허용, 환영하게 되고 그는 무려 20년 동안 미국 버몬트주에서 거주한다. 그 20년 동안 소련 공산주의 체제와 그 허구성을 알리면서 동시에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도덕적 타락상에 대해서도 우려와 날카로운 비판을 보내곤 하였다. 1992년, 마침내 공산 종주국 소련이 무너지고 본래의 나라이름 러시아와 ‘자유, 정의, 용기’를 상징하는 3색의 러시아 국기로 회귀한다. 이에 솔제니친은 미국에서의 20년 망명생활을 정리하고 1994년, 조국 러시아로 귀국하였다.
그렇다. 죽음에서 살아나려면 좋은 이웃을 만나야 한다. 암에 걸려 춥고 배고픈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죽어가던 지식인이요 뛰어난 작가였던 청년 장교 솔제니친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보리스 콘펠드 라는 참 좋은 이웃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이웃은 뛰어난 의사였을 뿐 아니라 영원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참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다. 의사 보리스 콘펠드가 솔제니친을 살려낸 좋은 이웃이었다면 하물며 인류의 소망이요 영원한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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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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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문 목사]십자가의 도 — 본질을 잃은 시대에 던지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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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1 Corinthians)
우리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치의 혼란과 영적 공허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정보는 차고 넘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확신은 옅어졌고, 관계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공동체의 깊이는 얕아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를 향한 질문은 피할 수 없다. 교회는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왜 존재하는가.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외형적 성장에 있지 않고, 오직 성경이 증언하는 십자가 복음에 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이라 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의 처형 도구로, 수치와 패배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 선포했다. 세상이 강함과 성공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할 때, 하나님은 약함과 낮아짐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이 역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이다.
초기 교회는 혹독한 박해를 견디며 이 복음을 지켜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가 전쟁을 앞두고 십자가의 표징을 보았다는 전승과 함께,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이 발표되면서 기독교는 공인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제도적 승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박해의 시기에도 성도들의 심령 속에는 십자가의 능력이 살아 있었다. 환경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신이 교회를 지탱했다.
325년 열린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중대한 논쟁의 장이었다. 아리우스(Ari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대립은 단순한 신학적 차이를 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참 하나님이신가라는 근본 문제를 다뤘다. 만일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십자가의 구원도 설 자리를 잃는다. 교회는 시대의 압력보다 복음의 진리를 택했고, 그 선택 위에 서 있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다. 죄는 가볍게 다뤄지지 않았고, 동시에 죄인은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모두가 죄인이며 동시에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교만을 꺾고 겸손을 세운다.
오늘 교회의 위기는 외부 환경의 변화보다 중심의 약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성장과 영향력이라는 언어에 익숙해진 사이, 낮아짐과 섬김이라는 십자가의 길은 희미해지지 않았는가. 십자가는 더 높이 오르기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더 많이 소유하기보다 더 많이 내어주라고 가르친다. 교회의 회복은 새로운 전략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십자가는 또한 은혜의 복음이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구원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 이 확신 위에 설 때 교회는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움직일 수 있다.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이후에 주어졌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고, 죽음 없는 생명은 없다. 십자가 없는 부활 신앙은 공허하다. 교회가 다시 십자가의 도 위에 굳게 설 때, 세상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변함없는 중심, 곧 십자가로 돌아가는 일이다. 교회의 능력은 규모에 있지 않고 복음에 있으며, 숫자에 있지 않고 진리 위에 있다. 십자가의 도를 붙드는 교회만이 시대를 넘어 영원을 바라보는 공동체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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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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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성 목사]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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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담임목회를 할 때 약 7년 동안 하루 3시간을 자며 사역을 했다. 일주일에 제자훈련을 4팀, 한번에 5시간씩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났는데,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 아픈 곳은 없는데 온몸에 힘이 없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산호세(San Jose)에 중국 할아버지 한의사가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갔다. 맥을 짚더니 85세보다 더 기력이 없다고 했다. 주일 설교만 겨우 감당하고 거의 2년을 누워 지냈다.
휴가 가는 것을 성도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해서 말도 못 꺼냈다. 쉬는 것을 부끄러워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강을 다 상할 정도로 사역하는 것을 과연 충성이라 하실까? 사역하다 누워 있는 사역자를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서 허락한 첫날은 놀랍게도 안식일이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쉬고, 즐기고, 누리도록 하신 것이 첫 선물이다. 일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고 즐기는 것이 먼저였다.
쉰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역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며 영적인 것이다. 사역이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인정하신 시간이며, 맡기고 쉬는 것이 사역을 더 잘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오래 전 이정석 교수(플러신학교)가 수련회 강사로 온 적이 있다. 그런데 “대체 잠은 언제 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휴가를 가라, 휴가를 가되 기도회, 세미나 가지 말고 책도 읽지 말고 그냥 빈둥빈둥 놀아라”고 강력히 권한 적이 있다. 쓰러지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시간인지, 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독일에서 사역할 때는 휴가가 한 달이었다. 첫 휴가를 앞두고 권사님 한분에게 “10월 중에 휴가를 가려는데 괜찮을까요?” 상의했더니 버럭 화를 내셨다. 교회에서 휴가를 주었으면 언제 갈지,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는 목사님의 고유한 영역이지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며 운영위원들에게 통보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말 교회 성도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현재 교회를 부임하며 아무 것도 요구한 것이 없다. 다만 휴가를 20일 달라고 했다. 옛날 같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쉼이 너무 중요해졌다. 멀리 떠나서, 평소에 만날 수 없었던 지인들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을 다녀온다. 평소에 읽지 못했던 분야의 책을 읽고 영화도 본다.
사역지를 옮길 때 미리 하나님께 2달의 여유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기도한다. 새로운 사역지에 가면 한동안은 정신없을 텐데 미리 충분히 쉬어야 사역에 집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사역지로 가게 된다.
사역자들이여! 쉬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일상 속에서 틈틈이 여유시간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다 맡기고 잠시 떠나가는 것도 너무 중요하다. 사역과 휴식의 균형, 사역영성 못지않게 쉼의 영성, 사역자들이여! 휴식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휴식을 누리고 즐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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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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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 목사]새해, 다시 교문 앞에 서며(미션스쿨에서 교목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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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학교는 아직 조용하지만, 나는 다시 교문 앞에 선다. 이 자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느덧 열아홉 해가 되었다. 매해 새해가 되면 마음속에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부름받은 사람인가.”
미션스쿨에서 교목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화려하지도, 늘 환영받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매년 새 학기마다 다시 이 자리로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이다. 교목의 가장 큰 보람은 시간을 견뎌낸 아이들의 변화에서 온다.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아이들은 기독교를 거리낌 없이 “개독”이라 불렀다. 그 말에는 상처와 불신, 그리고 종교에 대한 깊은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열여덟 해가 흘렀다. 설득보다 동행으로, 논쟁보다 일상으로 아이들을 만났다. 찾아가지 않아도 매일 마주치는 만남, 아침 인사, 복도에서의 짧은 농담, 힘든 날 말없이 함께 앉아 있는 시간이 쌓이며 아이들의 언어가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개독”이라는 말 대신 “기독”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 변화는 교육의 성과라기보다 삶으로 스며든 복음의 흔적이었다.
교목의 사역은 예배당에만 머물지 않는다. 상담실에서, 교실 뒤편에서, 운동장 벤치 위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삶 속에 있다. 함께 울고, 함께 버티며,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 쌓인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의 삶이 조금씩 달라진다. 포기하려 했던 아이가 다시 살아갈 이유를 붙들고, 관계 속에서 무너졌던 아이가 다시 사람을 믿어 보려는 용기를 낸다. 그 변화는 교목에게 주어진 가장 깊은 사명 확인의 순간이다.
아이들의 변화는 가정으로 이어진다. 한 학생과의 신뢰가 부모와의 대화로 확장되고, 학교에서 시작된 작은 만남이 가정의 분위기를 바꾸는 장면을 만난다. 그때 교목은 비로소 깨닫는다. 미션스쿨의 사역은 학교 담장을 넘어 가정의 복음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또 하나의 감사는 같은 미션의 가치를 붙들고 있는 동료 교사 공동체와의 연합이다. 교육이라는 치열한 현장 속에서도 신앙을 이유로 고립되지 않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은 새해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큰 힘이다. 그러나 이 사역에는 늘 그늘도 함께한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교사가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교목은 존재감이 적으면 “미션의 기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존재감이 커지면 “선교보다 일을 많이 해서 인기 끈다”는 오해를 받는다. 필요할 때는 찾지만, 견해가 다르면 돌아서며 “정치적이다”라는 말로 선을 긋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교목은 자연스럽게 고립감을 느낀다. 어느 날은 교사라는 기준으로 평가받고, 어느 날은 목사라는 기준으로 재단된다. 이중의 잣대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관리자의 성향에 따라 건학이념은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한다. 사시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관리자들에 의해 미션의 방향성이 외면되기도 한다. 결국 하루를 마치고 돌아서면 혼자다. 그러나 새해의 문턱에서 나는 다시 고백한다. 이 외로움마저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로 부르신 이유 안에 있음을. 올해도 새로운 아이들을 만난다. 다시 이름을 외우고, 다시 관계를 시작하고, 다시 복음을 삶으로 건네야 할 시간이다.
부디 이 새해에 지역의 미션스쿨에서 사역하는 교목들이 지치지 않도록 지역교회들이 함께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 미션스쿨의 교목은 교회와 학교 사이를 잇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 다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 다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새해에는 더 많은 연대와 격려가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새해, 나는 다시 교문 앞에 선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시작하실 일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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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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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정치에 집착하는 이단, 이단에 빌붙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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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의 정치권 불법 로비와 유착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미국, 일본, 한국에 주요 거점을 가지고 있는 통일교의 경전 『원리강론』에 따르면, 통일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문선명이 왕이 되는 지상천국 건설’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경제, 언론, 문화, 예술,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서 규모와 영향력 확장하며, 통일교 왕국 건설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가장 주요한 요인이 바로 ‘정치권 로비와 유착을 통한 특혜’였다.
최근 불거진 통일교의 무리한 불법적인 정치권 로비와 유착은, 통일교 70년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운명적인 행태인 동시에, 통일교가 마주한 심각한 안팎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첫째, 외부적으로는 최대 자금 기반 일본 통일교가 몰락으로 치닫는 상황이 초래한 결과이다. 일본의 유력 정치인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피격 살해된 사건이 통일교와 깊이 관련된 사실이 그 시작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일본 청년의 어머니가 통일교에 10억여 원을 바쳤고, 이로 인해 청년의 가정과 성장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통일교에 대한 적대감은, 2022년 거액을 받고 통일교 비대면 행사에서 연설했던 아베 신조에 대한 복수로 표출되었다.
사건 3년 후인 지난 10월에서야 관련 재판이 시작되었고, 일본 사회는 이 청년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를 두고 여론이 분분한 상황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통일교 종교법인이 해산되었고, 신도들은 혼란 가운데 있으며, 심지어 통일교의 종교 사기로 드러난 소위 영감상법 피해자 보상을 위해 일본 내 통일교 자금 동결까지 거론되는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다. 최대 자금원인 일본 조직의 쇠락은, 통일교의 최대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둘째, 내부적으로는 한학자와 아들들 간의 후계 전쟁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일본 통일교의 몰락과 함께, 통일교 후계자들 사이의 권력 싸움으로 인해 문선명 통일교가 분열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2012년 문선명 사망 후, 통일교는 부인 한학자의 평화통일가정연합, 3남 문현진의 글로벌피스재단(Global Peace Foundation, GPF), 그리고 막내 7남 문형진의 생츄어리처치(Sanctuary Church)의 세 개 분파로 분열돼 다투고 있다.
친어머니 한학자는 친아들들을 몰아내고, 셋째 아들 문현진은 한학자와 양보 없는 법정 소송을 이어가고 있으며, 막내아들 문형진은 유튜브를 통해 친어머니 한학자에 대한 공개적인 저주와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통일교가 주장하는 죄 없는 ‘참 가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모자(母子)가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거짓 가정’의 모습만이 노출되고 있다. 문현진은 한학자의 구속과 함께 영향력 확대를 노리며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고, 문형진은 아버지 문선명을 배신한 당연한 결과라고 어머니 한학자를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안팎의 위기 상황은, 통일교가 무리한 정치권 불법 로비와 유착을 가속한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한편, 정치권 로비와 유착은 비단 이단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공인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국민의 눈높이를 벗어난 정치권 로비와 유착을 시도한 부끄러운 행태도 드러나고 있다. 정치에 집착하는 이단도 문제이지만, 높은 도덕성과 정결함을 유지해야 할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빌붙으려 벌이는 일탈 행위는 더욱 심각한 병리적 현상이다.
이단의 불법 행위에 대한 법적제재를 논의하기 전에, 소위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끄럽고 비상식적인 행태를 예방할 수 있는 교회의 자구노력과 안전장치 마련이 오히려 시급하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이단 문제에 내성이 생긴 듯, 교회와 사회는 자꾸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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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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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범 목사]윤리의 경계석이 옮겨지는 시대에 교회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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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총신대 평생교육원에서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죽음의 정의와 본질, 존엄사와 안락사, 조력사 그리고 자살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갖고 강의도 하고 토론도 했다. 마지막에 수강생 중 미국에서 오신 장로님이 자신이 경험한 존엄사를 들려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오랫동안 중병을 앓던 아내가 어느 날 낙상하면서 의식을 잃었고 더 이상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자녀들 모두가 호흡기를 제거하는 최종 결정을 아버지에게 미루더란다.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을 결정해야만 했던 괴로웠던 순간, 이후에 진행된 과정과 법적인 절차 등을 들려주는데, 이론이 아닌 이 실제가 모두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 100세 시대에 죽음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최근 미국에서 코린이라는 여성이 2021년에 있었던 부모의 조력사를 공개했다. 어머니가 대동맥판막협착증 진단을 받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며 수술을 거부한 뒤 낙상 사고로 상태가 악화되자 92세에 조력존엄사를 신청했다. 그러자 이미 뇌졸증 증세를 보였던 95세의 아버지는 “아내가 먼저 떠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면서 함께 신청했다. 이 부부는 스스로 선택한 날 의료진이 제공한 약을 복용하고 한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딸은 이런 부모의 죽음을 행복한 죽음이라 미화하면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공론화하려는 목적에서 뒤늦게 이것을 밝힌다고 했다.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의 양태가 유럽이나 미국 여기저기서 수용되어 가고 있고 그 영향이 우리 사회에도 밀려오고 있다. 이것을 보도한 중앙일보(2025.10.30)는 기사 마지막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성인 응답자의 82%가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 찬성했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이 여론조사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갖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유럽이나 미국을 좇아 변해가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커다란 윤리적인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20세기 이후 전통적인 가정 제도가 서서히 붕괴하고 있고 성도덕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의과학의 급속한 발달은 출생과 죽음의 영역에서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미국은 20세기 초만 해도 인구의 2/3가 50세 전에 사망했지만, 2023년의 평균수명은 78.4세에 이르고 있다(한국은 83.5세). 노인병 전문의인 랭고는 “수많은 사람이 그토록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이렇게 오래 사는 문제를 인간 사회가 이전에는 직면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런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여기까지는 허용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라고 하는 윤리적인 경계선이 끊임없이 밀리고 있다. 어제는 인간적 행동의 한계를 넘는 것으로 간주하며 경계했던 것들이 내일에는 이미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치 밤사이에 누군가 경계석을 몰래 옮겨버린 것 같은 세상이다. 윤리신학자 스튀겔베르거는 이 시대를 비판하면서 유전공학, 컴퓨터공학을 앞세우며 이런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선동적인 말들이 힘을 얻으면서 ‘균형과 목적이 없는 세계’가 되어가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E. 브룬너는 이처럼 경계석을 옮기는 시대에서는 윤리의 기반 자체가 해체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적인 기반으로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세상의 거친 행보는 위기로 느껴지고,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좁고 협착한 길로 여겨진다. 생명의 시작점에 관한 논쟁, 인공수정, 안락사 문제, 환경문제, AI의 진화로 불거질 다양한 윤리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이런 21세기의 다양한 윤리 문제에 대한 지침을 성경에서 찾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며,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야 한다. 이를 통해 균형과 목적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기 쉬운 세상이 옳은 길로 가도록 돕는 그것이 또한 세상의 빛이고 소금인 교회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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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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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택정 장로]다수가 정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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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 사회는 ‘크기’와 ‘숫자’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 정치에서는 의석의 수가 곧 힘의 근거가 되고, 교회에서는 교인의 수가 힘의 잣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숫자가 곧 옳음의 증거는 아니다. 최근 국회에서도 절대 다수의 힘으로 법안을 밀어붙이거나, 다른 의견을 불편한 존재로 치부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겉으로는 ‘국민의 뜻’이라 말하지만, 그 안에 진정한 공론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독주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대형화되고 조직화된 교회의 흐름 속에서 “많이 모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사업이나 목회적 결정이 성경적 원칙에 부합하는가를 검토하기보다는, “다들 그렇게 하니 우리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앞선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다수의 관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있다. 다수가 찬성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으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다수의 불평에 휩쓸려 모세를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민수기 14장). 바알 선지자 450명과 맞섰던 엘리야는 외로웠으나 진리의 편에 섰기에 하늘의 불을 경험했다(열왕기상 18장). 미가야 선지자는 왕과 400명의 예언자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 곧 그것을 말하리라”(열왕기상 22:14)고 선언했다. 이처럼 성경의 역사는 다수의 여론이 언제나 옳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경고를 깊이 새겨야 한다. 교단은 종종 정치화되고, 언론은 침묵하며, 성도들은 혼란 속에 방황한다. 교회의 성장이나 재정의 풍요가 곧 신앙의 성공으로 오해되고, 진리를 지키려는 소수의 외침은 ‘비판’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3) 하셨고,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요한
복음 18:37)를 귀히 여기셨다. 교회의 본질은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서 진리가 얼마나 살아 있는가에 달려 있다.
오늘의 교회 위기는 외형의 축소가 아니라 비판과 검증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성숙한 공동체 일수록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성경으로 검증하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는 법이다. 바울사도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데살로니가전서 5:21)고 교훈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면역력을 지키는 길이다.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검증 없는 순종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성찰이다.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이 편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진리의 길은 아니다. 때로는 소수의 자리에서 외롭게 서야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마태복음 5:13-14) 하셨다. 빛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소금은 적을수록 그 맛이 깊다. 교회가 다시금 빛과 소금의 사명
을 회복할 때, 사회도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의 함성이 아니라 양심의 고백, 힘의 논리보다 진리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많은 자가 아니라 충성된 자”(디모데후서 2:2)이다. 다수의 찬성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한 사람의 헌신이 교회를 살린다.
다수가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진리는 말씀 안에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이 단순한 진리를 붙잡는 날, 우리는 외형의 크기보다 내면의 깊이로, 세상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공동체로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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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