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학교법인 이사회 보고서에 대한 반론
복음병원 역사(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 수정건
제72회 총회에서 상정된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연혁(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 수정 청원건> 에 대한 학교법인이사회의 보고서가 제73회 총회 회순(123p 참조)에 보고되었다. 우선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안건으로 상정해 주신 3개 노회와 지난 1년 동안 이를 심의하느라 수고하신 학교법인이사회 소위원회 위원들과 관계자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그동안 이사회가 본 건을 심의하면서 참고자료로 ‘복음병원 사령원부’, ‘제3영도교회 당회록’ 등을 인용했고, 참고인으로는 이상규 교수, 정남환 교수, 오경승 병원장, 김영대 원목실장, 조긍천 목사, 정수생 목사 등을 출석시켜 의견을 청취했다고 했다.
이사회의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에 대한 보고서 전문을 접한 필자는 우려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사회는 사료 전체를 인용치 않았고, 의도하는 결론을 위해 일부만 인용하고 있었다. 이미 오기된 역사자료를 표준인양 인용하기도 했다. 마치 “복음병원 역사는 수정할 것이 없다” 는 결론을 위해 짜맞추기식 논의를 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갖게 했다.
아직 총회가 개회되지 않았지만 첫 문제 제기자로서의 책임감과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총회 총대들이 본 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관점으로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이해하고 토의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기 제출된 이사회 보고서에 대한 필자의 소견과 반론을 준비했다.
1. 학교법인 이사회 보고서 내용은 다음 3가지로 요약된다.
1) ‘설립자’는 전영창선생이 설립했음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전영창, 한상동, 장기려 3인이 동역하여 설립했다”는 ‘설립자 3인설’을 인용했다.
2) ‘설립일’ 건은 제3영도교회 당회록과 복음병원 사령원부를 근거로 1951. 1. 15일이 아니라 1951. 6. 21일임을 종전 그대로 인용했다.
3) ‘초대원장’ 건은 복음진료소 첫 의사는 차봉덕 의사임을 인정하면서도 사령원부를 근거로 차봉덕이 초대원장이 아니라 장기려가 초대원장임을 인용했다.
결국 이번 이사회 보고서는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은 수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사회가 위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 주요 자료는 ‘제3영도교회 창립사’와 ‘복음병원 사령원부’였다. 이 두 자료를 근거로 복음병원 역사는 수정할 것 없이 복음병원 설립은 전영창, 한상동, 장기려 3인이, 설립일은 1951. 6. 21일, 초대원장은 장기려박사라는 종전의 역사를 수정없이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인용했다.
그렇다면 정말 이사회는 위 두 자료를 정확히 인용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사회는 위 두 자료를 사실대로 인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제3영도교회 역사는 앞 부분은 가린체 연혁 뒷부분만 인용함으로 총대들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도록 했다.
2. 이사회의 제3영도교회 당회록 및 발간사 인용 문제
이사회가 실수한 가장 결정적 장면은 제3영도교회 역사를 인용함에 있어서 역사 전부를 인용치 않고 당회록 앞부분에 있는 발간사만 인용했다는 점이다.
보고서를 보면 “제3영도교회 창립사에 의하면 주후 1951년 3월 6일 마산에서 개최한 제 54회 경남노회에서 인가받았고, 동년 3월 23일 예배당 공사를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월 하순에; 마루를 놓고 6월 3일 주일부터 예배를 보고, 9월 중순에 공사를 필하기로 되었다.”라고 하면서 “1951. 1. 15일에 제3영도교회에서 구제회와 진료소를 함께 시작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라고 결론 지었다.
이사회의 보고서처럼 제3영도교회는 1951년 3월 6일 경남노회 인가로부터 시작되었을까? 아니다. 제3영도교회는 이보다 2년 전인 1949년 8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제3영도교회 연혁을 보면 1949년 8월 7일 제일영도교회에서 영도 4개처 교회를 설립키로 하고 수요일부터 박상순전도사 인도로 42명이 모여 개척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고 있다. 1950년 3월 17일 202평 부지 매입, 1950년 11월 1일 가설예배당 완공, 1951. 3월 6일 경남노회에서 인가를 받았다. 이사회는 제3영도교회 역사의 앞부분은 전혀 인용치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제3영도교회 시작점을 1951년 1월 15일 이후로 해야만 1951년 6월 21일을 병원 개설일로 꿰맞출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만일 이사회가 1951년 1월 15일에는 시기적으로 병원을 시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교회역사 앞부분 2년은 생략하고 뒷부분만 인용했다면 이는 중대한 오류요 실수다. 제3영도교회의 연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1951. 6. 21일을 설립일로 옹호하기 위해서 한 교회의 역사마저 왜곡 인용했다면 이는 총회를 눈가림으로 속이려했고 또 다른 역사왜곡을 획책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한 실수인지 왜 그렇게 했는지 반드시 밝혀 주시기 바란다.
3. 복음병원 ‘사령원부(辭令原簿)’ 인용 문제
이사회가 복음병원 역사에 준거처럼 인용한 ‘복음병원 사령원부’는 과연 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에 대한 결정적인 문서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원부는 보고서의 인용과는 달리 설립자는 전영창, 초대원장은 차봉덕임을 더 확실히 입증해 주는 문서이다.
우선 이 ‘사령원부’는 가치 있는 사료(史料)일까? 이는 이 자료를 누가, 언제, 어디서 작성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검토해야 한다. 만일 이 사령원부를 1951년, 영도에서 전영창이나 장기려, 또는 당시 원무과에서 작성했다면 이 문서는 복음병원 역사에 결정적인 사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려 15년이 지난 이후 누군가에 의해 정리된 문서였다.
1) 이 ‘사령원부’는 1951년 영도에서 작성된 문서가 아니다.
이 사령원부 표지에 ‘主後 1951年 以降’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뜻 보면 마치 1951년에 기록한 문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以降(이강)이란 이후(以後)라는 뜻으로 1951년 설립이후 복음병원 직원의 임명내용을 정리해 둘 목적으로 기록한 명부란 뜻이다.
또한 이 문서는 부산 영도에서 작성된 문서도 아니다. 표지 왼편에 보면 이 문서를 작성한 장소가 명기되어 있다. “부산시 암남동 산 34번지 복음병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이 문서의 기록장소가 병원이 설립된 영도가 아니라 암남동 송도에서 작성된 명부임을 밝혀준다. 먼 훗날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2) 이 문서는 1965년 이후 이재술 장로가 작성한 명부였다
역사기록에서 누가 기록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사건 당사자인 장기려나 전영창, 또는 당시 원무과에서 기록한 문서라면 그 의미가 클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필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복음병원 서무과장이셨던 이재술 장로의 필체였다. 이재술 장로 가족에게 이 명부의 필체를 확인 요청했다. “제 부친의 글씨체가 독특해서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데 너무나 비슷합니다.”라는 답변이었다. 또 다른 유력한 원로에게 이 사령원부의 작성자가 누구일까요? 라는 질문에 “그 당시에 이런 문서를 작성할 분은 서무과에 근무한 이재술 장로님뿐이다”고 답변했다.
이재술 장로는 1965년부터 복음병원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거창고등학교에서 전영창 선생과 함께 서무과장으로 8년간 근무하다가 장기려 박사의 요청으로 1965년 2월 4일 부산복음병원으로 부임, 1971년 12월 31일까지 약 7년간 근무하셨다. 그렇다면 이 사령장부는 1965년부터 1971년 사이에 작성된 문서가 확실하다.
복음병원설립 후 15년~22년 어간에 이재술 장로가 작성한 사령원부는 그 당시 회자 되는 구전과 자료들을 근거로 작성된 것임은 자명하다. 이때는 이미 전영창이나 차봉덕은 복음병원 역사에서 배제된 때였고 장기려 중심의 역사로 재편되어 고착된 때였다. 복음병원 설립일도 이미 1951. 6. 21일로 지키고 있었으니 사령원부에도 첫 발령일을 6월 21일로 기록했다. 이 사령원부가 나중에는 복음병원의 정사(正史)로 변착(變着)되어 ‘고신의료원 50년사’에도 그대로 인용 되는 등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3) 이 사령원부는 전영창 선생이 설립자임을 밝혀준다.
이 사령원부에서 제1호로 임명된 직원은 총무 전영창이다. 누가 임명했나? 전영창이 전영창을 발령했다. 발령처 대한기독교경남구제회 대표자가 전영창이기 때문이다. 경남구제회(법인격) 이사장인 전영창이 병원의 총무로 자신을 임명한 것이다. 당시 전영창은 법인의 대표나 직함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병원의 총무로 임한 것은 본인 스스로가 총무로 자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병원초기 총무처럼 모든 시설, 장비, 의료기 구입, 수선, 운영일체를 도맡았다. 그래서 장기려박사도 당시 전영창을 ‘총무요 설립자’라고 표현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설립자가 법인과 병원의 대표자가 된다. 지금의 의료법상으로도 그렇다. 이 사령원부가 비록 전영창을 병원의 총무로 임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법인과 병원의 대표자요 설립자인 것이다.
경남도청도 1951. 12. 23일 복음의원을 의료기관으로 인가하면서 전영창을 병원의 대표자(경남도보 제 103호, 개설대표자 전영창)라고 명시했다. 주무관청이 전영창을 설립자요 대표자로 허가했으면 병원설립자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금번 보고서가 전영창, 장기려, 한상동 3인이 동역해서 설립했다는 병원설립자 3인설을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는 주무관청의 허가마저 무시한 것이고 의료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개원할 때 한상동 목사는 전여 관여치 않았고, 장기려 박사는 6개월 후에야 2대 원장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분이 공동 설립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의료법 제33조(개설 등)는 법인 또는 의사 1명만이 의료기관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사회가 복음병원 3인 설립설을 인용하려면 최소한 대한민국 의료법이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한 상식은 가지고 인용했어야 했다. 3인 설립설이 불가능한 4가지 이유는 필자의 “나삼진목사의 복음병원 설립자 3인설에 대한 반론”(기독교보 2022. 7.13일자)을 참고하기 바란다.
4) 이 사령원부는 차봉덕의사가 초대 원장임도 밝혀준다.
이 사령원부는 인사발령 제2호 차봉덕을 의사로, 제6호 장기려를 원장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이 원부는 차봉덕을 첫 번째 의사로 임명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의료법 제33조에 따르면 처음 개설하는 의사가 원장이고 초대원장이 된다. 대한민국 의료법 제 33조 8항(그 밖의 규정)에는 “의료인은 의료기관 개설시 어떠한 명목으로도 둘 이상의 의료기관을 개설 운영할수 없다”로 되어 있다. 한명의 의사가 둘 이상의 의료기관에 중복해서 근무해도 불법이 된다. 장기려박사는 6월 말까지 제3육군병원에 외과과장으로 계속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7월 2일에 부임했다. 개설시 있지도 않은 장기려를 초대원장이라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비록 이 원부가 기록자에 의해서 차봉덕을 의사로, 뒤에 부임한 장기려를 원장이라고 기록했다 해도 의료법상으로는 처음 개설한 의사가 원장이 되는 것이다. 모든 판단 기준은 법을 따라야 한다.
따라서 이 사령원부는 의료기관 개설에 대한 의료법에 반하는 인위적 기록이다. 이사회 보고서가 아무리 장기려를 초대원장이라 강변해도 이 사령원부는 오히려 차봉덕의사가 초대원장임을 입증하고 있다. 사실(fact)을 호도, 왜곡한 기록은 역사가 될 수 없다. 이 기록은 기록자 또는 주변의 의도가 개입된 기록, 즉 차봉덕을 배제하고, 장기려를 초대원장으로 만들기 위한 인위적 기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기록이 중요하지만 사실을 왜곡한 기록은 역사가 될 수 없다.
5) 대한기독교경남구제회와 복음진료소는 동시에 설립했다.
이사회 보고서는 경남구제회와 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할 수 없다고 했다. 1주일 만에 두 기관을 설립하는 것은 ‘무리’라는 주관적 해석으로 1951. 1. 15일 병원 설립일을 부정하고 있다. 부정하려면 이를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사료를 제시해야 함에도 이사회는 그 어떤 사료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무리’라는 추론으로 부정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법인과 수익기관(병원)은 동시에 설립한다. 심지어 병원설립이 되지 않으면 법인허가도 인가되지 않는다. 6.25전쟁 중 5천불 구호금을 가지고 미국에서 급거 귀국한 전영창 선생이 불과 1주일 만에 구제회(법인)와 진료소를 설립한 것이 왜 ‘무리’라고 억측하는가? 당시는 전란 중이었고 수십만의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와 구호를 위해 백방으로 뛰며 마음이 급했던 전영창이 1주일 만에 구제회와 진료소를 준비하는 것이 왜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가? 지금의 여유있는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안된다. 그때는 그만큼 시대가 급박하고 긴박했었다.
또한 당시에는 국민의료법이 제정되기 전이므로 의사가 진료하는 곳이 집이든 창고든 어디서나 병원개원이 가능했다. 의료법이 없는 시대에는 의사만 있으면 이틀만에도 병원 개원이 가능하다. 구제회와 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1월 설립 후 불과 두달 후인 그해 3월 경남노회가 각 교회로 하여금 헌금하여 보내 주도록 결정한 것은 경남구제회가 운영하는 진료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은 부산 영도로 이사를 오니 진료소 앞에는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재료(밀가루 옥수수 등)로 끓인 죽을 받기 위해 선 줄이 200m는 되었다고 회상했다. 경남노회가 결의해서 보내 준 구호헌금은 이렇게 쓰인 것이다.
경남구제회와 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했다는 것은 설립자 전영창의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전영창은 그의 자서전격인 전영창 전집Ⅱ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연혁에서 “1951. 1. 15일 피난민 무료진료소 복음병원을 개설”했다고 남겼다. 그의 장례식 연혁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고 되었다. 그의 아들 전성은이나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설립자 본인이 1. 15일 구제회와 병원을 설립했다고 설교시나 강연때 자주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이사회가 이를 부정할만한 사료나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리”라는 말로 부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 외에도 1. 15일 병원을 설립했다는 여러 근거 및 자료는 많다. 필자의 <복음병원 숨겨진 초기역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4. 마무리 하며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다룬 이사회의 총회 보고서 결론은 “복음병원 역사는 수정할 것이 없다”였다. 필자는 이사회가 그 근거로 제시한 ‘제3영도교회 역사’와 ‘복음병원 사령원부’의 실체를 분석하면서 그 인용이 부적절했음을 지적했다. 이 두 문서는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반대할만한 사료가 될 수 없다. 오히려 3개 노회가 제출한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지지하는 사료들로도 볼 수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사회 보고서는 제3영도교회 역사를 잘못 인용했다. 사령원부 또한 복음병원설립 후 15년 이후 작성된 문서로서 이미 전영창과 차봉덕이 복음병원 역사에서 배제되고 장기려 중심의 역사로 고착된 때 작성된 문서임을 밝혔다. 이 사령원부가 나중에는 복음병원의 정사(正史)로 변착(變着)되어 ‘고신의료원 50년사’에도 그대로 인용 되었고 오기된 역사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신총회 70년사(총회출판국, 2022)에서는 설립자는 전영창, 설립일은 1951. 1. 15일, 초대원장은 차봉덕을 정사(正史)로 남겼다. 바라옵기는 이번 고신총회가 3개 노회에서 제기한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을 객관적 사료들을 기준으로 검토해 주시고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단의 역사학자들과 관계자들이 공청회나 학술발표회 등을 거치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합의점을 도출하여 복음병원 역사와 연혁을 수정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5. 수정해야할 복음병원 정사(正史)는 무엇일까?
1) 복음병원 설립자는 전영창선생이다.
(1) 장기려 박사의 증언.
장기려 박사는 복음병원 회보인 ‘영아와 유아의 찬미’(창간호) 권두사에서 전영창을 일컬어 “설립자 전영창씨는”(장기려, 영아와 유아의 찬미 창간호, 1951)이라고 칭했다. 복음병원 회보 제4집(1976년)에서도 “본원의 설립자이며 총무 일을 보아 주셨던 전영창 선생”이라 했다. 또한 한국일보 연재기사(1976년)에서도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씨와 함께” 라는 설명을 사진과 함께 남겼다. 그 외 그의 자서전 등 여러 곳에서 설립자는 전영창임을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각종 언론, 세미나에서 장기려박사를 설립자라고 말한다. 복음병원 연혁에 아직도 설립자를 전영창으로 표기하지 않고 있다.
(2) 주무관청인 경남도청의 확인
1971년 발행된 복음병원 회보 <영아와 유아의 찬미> 제 3집 복음병원 연혁에 “1951. 12. 23. 복음의원 개설 허가받음(경남도보 제 103호, 개설대표자 전영창)”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경남도청이 복음의원 설립자를 전영창으로 확인해 준 것이다. 주무관청이 전영창을 개설대표자로 인정했으면 다시는 3인설 같은 주장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3) 황영갑(차봉덕원장 남편), 전성은(전영창의 아들), 차진실(차봉덕원장의 조카), 맹숙희(초창기 간호사), 성소균, 이재술, 지강유철, 이상규 교수 등 수많은 분들이 전영창선생을 설립자로 증언했다.
2) 복음병원 설립일은 1951년 6월 21일이 아니다.
(1) 1951년 6월 21일은 장기려 박사가 제 3육군병원에 재직 중일 때다.
지강유철의 장기려 자서전에는 “1951. 6. 21일 한상동, 전영창, 그리고 경남구제위원회 회계 김상도 목사와 함께 제 3육군병원(외과과장 장기려박사 근무지)으로 찾아갔다. 선생은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고는 채 열흘이 되기 전인 6월 30일 제3육군병원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6월 21일은 전영창이 외과의사를 구하기 위해 한상동목사의 소개로 장기려박사를 만난 날일뿐이다. 6월 21일이 개원일이 될 수 없는 이유다.
(2) 경남노회 회의록도 1951년 6월 이전에 설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3월 6일~8일 마산문창교회에서 개최된 제54회 경남노회에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승인하고 각 교회는 연보하여 구제회로 보내 주시되 연보는 4월 29일 주일 일제히 하여 주기로 함” (맹호원, 경남노회 회의록, 角丸인쇄소, 1929). 이 결의는 복음진료소가 1951. 6월 23일 이전에 이미 개설되었음을 의미한다.
3) 복음병원 설립일은 1951년 1월 15일이다.
1951년 6월 21일이 복음병원 설립일이 아닌 이상 이제 남은 것은 1951년 1월 15일뿐이다.
이 날짜는 전영창 전집Ⅱ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마루그래픽스, 2013. 9.15>의 연혁에서 확인된다. 또한 전영창 선생의 장례식 때 보고된 장례식 순서지 연혁에서도 “1951. 1. 15. 부산에 복음병원 창설”로 기록했다. 이에 대해 전성은은 “이 날짜는 아버지가 학교에서 설교나 훈시 시 자주 말씀하신 내용으로서 1951년 1월 9일 미국에서 유학 중 급거 귀국하여 1월 15일에 경남구제회와 복음병원을 설립하셨다고 말씀하셨기에 그것을 근거로 연혁에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전성은, 경남 거창 자택에서, 김세중, 고명길에게 증언, 2014. 5. 19)
4) 초대원장은 차봉덕 원장이다.
복음병원의 초대원장이 차봉덕이라는 사실은 장기려 박사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영도 복음진료소에 갔을 때 서울의전 출신 여의사(차봉덕)가 근무하고 있었고 이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또한 차봉덕의 남편 황영갑 목사의 자서전에서도 확인된다. 그 외 차봉덕원장의 조카 차진실 사모, 당시 간호사였던 맹숙희 권사, 전기기사 김종열장로 등의 증언에 의해서도 확인이 된다. 늦게 발굴된 복음병원 사령원부도 차봉덕을 첫 번째 의사로 재직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당시에는 의대 졸업장만 있으면 가정집이던 창고던 어디서나 개원할 수 있었다. 복음진료소도 의사가 진료하는 엄연한 병원이었다. 차봉덕원장이 6개월 만에 이임하고 전영창선생마저 3년 후 병원을 떠나자 장기려박사 중심으로 병원역사가 정리되다 보니 정영창, 차봉덕 원장의 이름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초대원장이 바뀔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법상 단 3일을 근무했다해도 첫 개설의사가 초대원장이 되는 것이다
6. 고신총회 총대님들께 드리는 고언
1) 학교법인 이사회의 보고서가 주관적 역사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 사료들을 정확이 인용했는지를 검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2) 검증 시 역사학자들의 사료(史料)에 근거한 설명과 관련자들의 의견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3) 다양한 의견이 있을 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다각적인 객관적 사료 조사와 연구, 학술토론, 공청회 등을 통해서 합의점을 도출하고 결론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병원의 숨겨진 역사는 단순히 복음병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영창 선생을 축출하고 역사를 오기한 분들 역시 고신의 초기 인사들이었기에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고신정신과 정체성 문제로까지 연결됩니다. 이런 점에서 총회의 복음병원 역사 수정건 심의는 결코 가벼이 할 수 없으며, 그 역사적 소임과 책임이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이 분리될 때 교회당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새롭게 개척한 것은 물질을 초월하는 순교자적 신앙과 순수성이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복음병원문제에서는 왜 전영창을 부정축재자로 억지 탄핵하고 축출했었는지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천막병원에서 점점 확장되고 커져가는 복음병원 재산권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음은 그 당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전영창이 복음병원의 이사장으로서 훗날 자신의 재산이라고 주장할까 두려웠던 것일까요? 1953년 전영창을 탄핵하는 임시노회에서 조수옥, 전성도, 황철도, 김상도, 안용준, 최일영목사 등이 그토록 반대하며 전영창의 무고를 변호하고 항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앙의 정통과 순교정신을 강조한 고신을 향한 충고와 항변은 아니었을까요? 지체된 정의도 정의가 아니지만 불의한 결정과 왜곡을 그대로 지나치는 것은 더더욱 정의가 아닐 것입니다. 코람데오 정신도 아닙니다.
부디 바라옵기는 학교법인이사회와 총회는 몇몇 사람의 주관적 역사해석이 아니라 객관적 사료를 근거로 검증해 주시고,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기술방법에 따라 학술토론이나 공청회 등을 통해 공정하게 심의결정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더 확실한 새로운 사료가 나오면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따를 것입니다. 그동안 이 일에 수고하신 학교법인 이사회와 관계자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