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Risen, 2016
드라마 미국 107분 2016.03.17 개봉
감독 : 케빈 레이놀즈
주연 : 조셉 파인즈(클라비우스), 톰 펠튼(루시우스), 클리프 커티스(예슈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모체며 이로 인해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고 바울은 강력히 주장한다. 이 기초 위에 기독교가 세워졌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에 새기고 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와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우리 시대의 감상적 느낌과 달리, 십자가는 고대 사회, 특히 로마 사회에서는 수치 그 자체였다. 주지하듯 십자가형은 로마가 살인이나 무엇보다 로마 제국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를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십자가는 극심한 고통 및 수치를 주기 위해 행하던 방식이었다. 예수님만 십자가 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십자가 형은 빈번하게 이뤄졌다. 게르트 타이센 등의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주후 6년 경 갈릴리의 세포리스 지역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군이 일어났고, 시리아 주둔 로마군이 진격해 와서 반란군을 제압했고, 당시 반란에 가담한 유대인 남자 약 2천명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고 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끔찍함이자 저주의 상징이다.
하지만 바울은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라 말한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다른 죄수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자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형벌로 십자가형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자기 죄가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의 백부장의 증언을 기록한다.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마가는 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한다.
로마 백부장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 자신이 집행하던 그 어떤 죄수와도 달랐음을 그는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십자가 형틀 위에서 자신과 타인을 저주하는 대신 예수님은 용서를 선언하셨다. 그 남다름, 그 위대한 선언에 백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신의 아들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하나님의 아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로마 사람들도 ‘신의 아들’을 숭배했다. 어떤 이는 황제 가이사가 죽지 않았다고 했고, 네로가 부활했다고 믿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신의 현현이라 말했다. 만약 누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진정한 신의 아들이자 세상의 통치자로 증명된다. 이것이 로마 사회의 중요한 인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추적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제자들이 아닌 제 삼자, 로마의 호민관 클라비우스를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시킨다. 클라비우스는 총독 빌라도의 요청에 따라, 예수가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잠재우라는 명령을 듣고 조사에 나선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부터 꼼꼼히 조사한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을 조사하고, 이어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들의 비밀 공동체를 추적해 들어간다. 또한 클라우비스는 로마의 관료로써 골고다의 다른 시체들과 무덤들까지 정밀하게 조사한다. 혹시나 시신을 유기하고 거짓말 한 것이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함이다. 클라우비스의 목적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은 엉터리며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 영화는 클라우비스의 극적 체험을 다룬다. 제자들을 쫓던 클라우비스는 제자들 사이에 보이는 예수님으로 인해 놀라고,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 놀란다. 적을 적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그들의 사랑에 놀란다. 결국 클라비우스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진다. 그가 든 칼 뿐 아니라 그의 가치관 자체가 무장해제 된다. 로마의 정신 PAX ROMANA의 허상을 깨닫는다. 진정한 평화는 자기희생이요 사랑임을 체화해 간다. 그 과정은 영화를 통해 직접 보면 좋을 듯 하다.
영화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꼼꼼하게 추적해 보았느냐고 묻는다. 의심의 터널을 거쳐서 확신의 빛에 이르렀냐고 묻는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예수님의 부활을 무작정 믿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자기 확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 부조리의 신앙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또한 영화 ‘부활’은 묻는다. 만약 부활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당신은 클라우비스처럼 인생 전체를 걸 수 있냐고, 클라우비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랑의 길로 갈 수 있냐고 묻는다. 로마의 장교였던 클라비우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삶이 극적으로 바뀐다. 사도 바울도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고 유대인을 세계 위에 세울 날 이루어질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 전에 누군가 부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분명히 죽었다고 여겼던 그 분을 만났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만남으로 인해 바울은 변화되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부활을 전하고 다녔던 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그가 도리어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하는 사도가 되었다.
오랜 후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믿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설 [죄와 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 자신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하고 자신의 죄를 숨긴 채 살아가지만, 결국 하숙집 소녀 소냐가 읽어준 요한복음 11장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앞에 엎드렸다. 그의 양심이 살아나고 내면에서 새로운 삶이 살아났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즉시 경찰서로 향하여 자수하고 시베리아 형무소로 가는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변화되었다. 죽었던 양심이 살아났다. 살았으나 죽었던 삶에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시베리아 행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라스콜은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삶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얼마 후 또 한 명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 역시 자신의 마지막 장편 소설 제목을 [부활]로 정한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소설에서 톨스토이 자신의 대역인 네흘류도프 공작은 복음서를 읽던 중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접한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내면은 부활의 주님에 대한 감격으로 벅차오른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영지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할 계획을 세운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자신의 종이 아니라 형제다. 형제 자매가 된 자들에게 네흘류도프 공작은 땅을 상속한다. 분배한다. 왜냐면 예수 안에서 하나 된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면의 부활은 외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 클라비우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도 바울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고, 라스콜니코프처럼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되고, 네흘류도프처럼 형제애가 살아난다. 삶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가? 나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나는 변화되었는가? 삶의 열매가 맺어지는가? 부활은 결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명심하면 좋겠다.